슬롯 머신

인류를 구원 한인의 의사

 1  인류를 구원 한인의 의사-1
 2  인류를 구원 한인의 의사-2
 3  인류를 구원 한인의 의사-3
 4  인류를 구원 한인의 의사-4
 5  인류를 구원 한인의 의사-5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인류를 구원 한인의 의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의사란 무엇인가. 단순히 환자의 질병을 알아내고 고치면 그것으로 임무를 마쳤다 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좀 더 크게 생각하고 싶다. 물론 환자의 질병을 고치는 것이 의사의 1차적인 의무이긴 하지만 그보다 더 크게 인류의 삶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의사의 본연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report를 작성해 보았다.
본론
내가 본론에 적고자 하는 의사들은 서론에서도 언급했지만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업적을 남긴(내 주관이 가득 담기긴 했지만) 이들을 위주로 선발 하였다. 물론 그 외의 의사들은 별 볼일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 기준으로 봤을 때 그래도 더 훌륭하지 않느냐하는 인물을 꼽았음에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1. 베살리우스
내가 베살리우스를 3인의 의사, 그것도 가장 첫 번째로 꼽은 이유는 무엇보다 해부에 기인한다. 베살리우스 이전의 서양 의학에서 누가 갈레노스를 부정하려 했단 말인가. 그것도 그것이지만 해부를 통한 인체 질병의 원인을 찾고자 했던 점에서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그래서 가장 첫 번째로 베살리우스를 꼽았다.
베살리우스는 가문의 전통을 따라 먼저 루뱅 대학교에서 인본주의 문학을 공부했고 1533년에 파리대학교로 의학을 공부하러 떠났다. 파리는 갈레노스주의 부활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베살리우스는 거장의 문헌을 배우는 것은 물론, 그 곳에 머무는 동안 해부에 관한 그의 기술도 배우게 되었다. 1536년 파리에서 갈레노스의 시대가 갑작스레 끝나고 마는데,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전쟁 때문이었다. 그는 루뱅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1537년에 의학으로 학위를 받는다. 해부에 대한 열정과 인체에 대한 관심은 1536년 가을에 일어난 사건에서 확실히 드러나는데 그때 그는 인체에 대해 연구를 하러 루뱅 외곽의 교수대에서 사체를 훔쳐 집으로 가져갔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루뱅의 의학교수들은 보수적이었지만 전쟁이 계속되는 탓에 베살리우스는 파리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학위를 마치자마자 이탈리아로 가서 1537년 말에 파도바 대학교 대학원생으로 등록했다. 그렇지만 이는 단순한 형식적 절차였다. 첫 번째 시험을 수월히 통과하자마자 곧바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파도바 대학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의 ‘전통’을 이어가는 인기만점의 선생이었다. 하지만 교수로 재직하면서 갈레노스가 인체해부에 대한 경험이 거의 또는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뒤 인체 해부에 대한 책을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실험대상에 대한 베살리우스의 총체적인 접근은 엄밀히 말해 혁명적이지는 않았지만, 이전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의미심장한 첫 걸음이었다. 중세시대에는 해부할 일이 생기면 시연을 목적으로 외과의사에게 그 일을 떠넘겼다. 외과의사는 하찮은 의료 종사자로 취급받았던 데 비해 학식을 갖춘 교수는 말 그대로 안전거리를 유지해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실험대상에 대한 강의를 펼쳤다. 그와 달리 베살리우스는 직접 해부 시연을 보임으로써 학생들에게 해부학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이로써 파도바에서 비롯된 관습이 점차 퍼져나감에 따라 다른 곳에서도 외과의사의 지위가 올라갔다. 그는 또한 수업에 쓸 커다란 그림을 준비하려고 뛰어난 화가를 고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인체에 대한 정확한 묘사는 갈레노스의 오류를 간파하기에 충분했다.
베살리우스의 파리 대학 시절 스승인 실비우스를 비롯하여 많은 의사들이 베살리우스를 곱지 않게 보았던 것은 천년이 넘도록 도전받지 않았으며 그들 자신이 신봉해마지 않던 갈레노스에 대해 감히 그 오류를 지적한 베살리우스의 자세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비우스도 불경스런 제자의 오류를 공격하기 위한 근거를 얻고자 제자의 방법을 따라 직접 해부하고 관찰한 결과 갈레노스의 여러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잘못들은 물론 인체 해부를 할 수 없었던 갈레노스가 원숭이와 돼지 등 동물 해부에서 관찰한 사실들을 인체에 확장 적용함으로써 생긴 것들이었다. 대부분의 의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갈레노스의 절대적 추종자였던 실비우스는 차마 갈레노스의 오류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갈레노스 이후 천 몇 백 년 사이에 사람의 구조가 변했다는 천재적인 변명을 늘어놓게 된다.
이제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의사인 해부학 교수가 자기 손으로 직접 해부하고 눈으로 관찰한 결과를 묘사하는 것은 그 무렵까지는 이단적인 행위였다. 해부를 하는 것은 당시로는 비천한 신분인 이발사 외과의의 몫이었다. 결국 베살리우스는 당시의 정상적인 규범에서 일탈한 행동을 통해 새로운 의학의 시대를 연 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장인적 전통과 (철)학자적 전통이 만나 새로운 패러다임의 학문이 열리는 근대 과학혁명기의 특징이 의학과 해부학에 나타난 현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베살리우스가 해부학을 하루아침에 혼자 힘으로 창조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학문적 성취는 거의 없었지만 베살리우스 이전 몇 백 년 동안 많은 사체 해부 행위가 있었다. 당시 뛰어난 외과 의사였던 베렌가리우스는 100구 이상의 주검을 해부하여 1521년에 인체해부도를 만듦으로써 베살리우스의 해부학 혁명을 예고하였다. 죽은 지 200년이 넘어서야 공개되었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수많은 시체 해부를 하여 다수의 해부도를 남긴 것도 베살리우스 직전의 일이었다.
베살리우스의 는 저자 스스로 직접 행한 인체 해부에 근거하고 새로운 인쇄술로 펴낸 첫 번째 해부학 책이다. 어렸을 때부터 작은 동물을 해부하기 즐겼던 베살리우스는 파리 대학 의학부에서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여러 가지 동물과 인체를 해부하였다. 그는 의학사 학위를 받은 뒤 당시 의학의 중심인 이탈리아의 파도바대학으로 가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537년 외과 및 해부학 교수로 임명을 받았다. 그 뒤 몇 해 동안의 준비를 거쳐 1543년 스위스 바젤에서 일곱 권으로 된 해부학 책을 출간하였다. 공교롭게도 이 1543년은 중세적 우주관을 무너뜨리고 근대적인 우주세계관을 세우는 데 밑받침이 된 코페르니쿠스의 가 출간된 해이기도 하다. 우연이지만 천문학과 인간학에 대한 근대적 과학혁명의 출발은 바로 이 해에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베살리우스는 자신의 책에서 사체 해부 등 손으로 하는 모든 행위를 경멸하는, 대학 교육을 받은 보수적인 의사들의 행위에 대해, 그리고 그러한 행위의 위험에 대하여 언급했다. 또 사람 대신 원숭이, 돼지 등을 해부하고 그 결과를 망설임 없이 인체에 적용하였기 때문에 생겼던 갈레노스의 오류, 예컨대 다섯 엽의 간, 일곱 조각의 흉골, 뿔 모양의 자궁 등을 자기 스스로의 관찰을 통해 교정하였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지금껏 서양의학을 지배했던 갈레노스의 오류를 지적하고 새로운 해부학의 역사를 시작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3인의 의사 중에서도 첫 번째로 나와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