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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윤리교육론 - ‘동정심의 윤리학 ’ 흄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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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양윤리교육론 - ‘동정심의 윤리학 ’ 흄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동정심의 윤리학.’ 흄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일단 시대적 배경을 보자면 근대가 시작되고 18세기에 철학은 3인칭에서 1인칭의 나에 대한반성, 관심으로 돌아왔다. 이전 철학자에게는 존재란 무엇인가, 신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었다면,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다. ‘나’라는 개념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시대, 이런 의미에서 근대를 가리켜 주관주의나 반성의 시대라고 특징짓는다. 이 물음이 중요해진 것은 근대인들이 ‘나’를 새롭게 발견하고 의식하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든 이제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앎을 통해서만 나에게 주어진 세계의 본질도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피조물이 아니라 나에 의해 의식되고 사유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보는 세계의 참모습을 파악하기 위해서 세계를 보는 우리 자신을 먼저 이해해야한다. 여기서 자기 동일성의 원리라는 개념이 나올 수 있다.(자료를 찾았지만 어렵게 제가 이해가 안 돼서 쓰지 못했습니다..)
고대와 중세의 철학자들은 선을 원칙적으로 사물의 객관적 성질로 이해하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에 따르면 선이란 존재 그 자체의 완전성 또는 탁월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어떤 존재가 자기의 일을 탁월하게 수행하거나 자신의 가능성을 완전하게 실현하고 있을 때 그 존재는 좋은 것 또는 선한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고유한 본성을 가장 완전하게 실현 할 때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인데 이러한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성품인 덕은 이성의 실현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고대적 윤리학은 객관주의적 윤리학이며 이성중심의 윤리학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철학자들은 더 이상 도덕의 문제를 객관적 존재나 이성의 힘을 통해 이해하고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객관적 근거 이외의 주관적 확신을 요구한다. 고대는 우리가 도덕적 법칙들을 따를 때에만 존재의 완전성과 탁월함을 실현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도덕적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18세기 철학자들은 아무리 ‘객관적인 근거’를 대며 설득하려 하더라도 자기 스스로 ‘주관적인 확신’이 서기까지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흄은 인간의 도덕적 판단과 행위에 있어 중요한 요인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도덕에서는 무엇보다도 실천이 중요한데, 감정은 행위의 동기가 될 수 있는 반면, 이성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흄은 “첫째, 이성은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의지 활동의 동기도 될 수 없다. 둘째, 이성은 의지의 방향을 결정할 때 결코 정념과 상반 될 수 없다.” 라고 말하고 있다. 흄에 따르면 이성은 참과 거짓을 발견하는 능력이다.어떠한 사실을 식별하거나 관념과 사실 사이의 불일치를 판단 할 수 있다. 이성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 있을 뿐,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이성은 수동적이며 도구적인 능력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을 선하게 만들지도 악하게 만들지도 못한다. 이성은 선도 악도 분별하지 못하는 가치 중립적 능력이다. 정말 지식이 많다고 해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은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데는 아무 쓸모가 없다.
기계공은 이성을 사용하여 기계의 움직임을 주어진 목적에 맞출 수 있고, 상인은 이성을 사용하여 자기가 진 빚이 얼마인지를 계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성은 어떤 행동이 인과적으로 어떤 결과로 이어질 것인지를 파악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 이러한 인과관계는 목적이 주어졌을 때 주어진 목적에 도달하는 수단을 찾아내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리고 일시적이며 말초적인 격정에 사로잡혀 행동했다가는 원하는 바와 반대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목적을 추구할 것인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서 이성이 기여하는 바는 없다. 목적의 영역은 본질적으로 의지의 영역이며, 의지는 각 개인의 성향(propensity) 또는 성정과 결부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성정의 노예이며 노예이어야만 한다. 이성은 성정에 복종하고 봉사하는 이외에는 결코 어떤 직무도 탐낼 수 없다.“
흄은 “ 덕과 악덕은 단지 이성에 의해 발견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관념들의 비교에 의해 발견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 사이의 차이를 식별할 수 있는 것은, 덕이나 악덕이 유발하는 어떤 인상이나 정서를 통해서임이 분명하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덕과 악덕을 분별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이성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므로, 이 것은 오직 감각에서 유래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 점을 흄은 “도덕성은 판단되기 보다 느껴진다”라고 말한다. 흄은 모든 의식 활동을 감각 자료에 환원시키고 있다. 즉, 우리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든지 간에 마음속의 모든 의식 내용이 감각으로부터 생겨난다는 경험론의 입장이다. 이런 것은 도덕적 판단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흄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행위나 성품을 판정할 때 적용하는 선과 악, 덕이나 악덕과 같은 윤리적 범주들 역시 어떤 종류의 감각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결론 내린다. 선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능력과 지식을 습득하는 이성적 능력을 근본적으로 구별하였기에 지식의 경우 감각적 인상을 그 원천으로 주장하는 반면, 도덕의 경우 쾌락과 고통이 그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원칙적으로 우리에게 쾌락을 주는 것은 선하고 고통을 주는 것은 악하기 때문에 유덕한 행위는 유쾌한 느낌을 주지만 부덕한 행위는 거북하고 불편한 느낌을 준다. 우리가 도덕적 문맥에서 느끼는 쾌락과 고통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 느끼는 쾌락이나 고통이다. 도덕감은 좁은 의미의 개인의 이기심을 초월하는 것으로 보편적인 고통 또는 보편적인 쾌락에 대한 감수성이다. 이러한 입장은 전통적인 이성 중심의 철학과 대단히 다른 입장이다. 전통적으로 철학자들은 이성만이 보편을 인식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감각이나 정념은 일회적이고 개별적인 것으로 여겼다.
사람들을 참되게 하나 되게 하는 것은 이성이라기 보다는 감성이다. 지식의 보편성이 모든 인간을 참된 의미에서 하나로 만들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쉽게 말해 인간이 보편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인간이 이기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을 참된 의미에서 하나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기쁨과 슬픔 그리고 쾌락과 고통이다.
또한, 그는 모든 사람에게 타인의 행복과 불행을 함께 느끼는 공감의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것에 대해 우리가 쾌감을 느낄 때 바로 그것이 선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흄에게 문제가 제기 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쾌락이나 고통이 어떻게 공유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정말 엄밀히 말하자면 어떤 경우에도 내가 느끼는 감각은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 감각은 육체를 통해 발생하는데 자신의 육체는 오직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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