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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이성비판의 목표와 의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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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순수이성비판의 목표와 의의에 대하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순수이성비판』의 목표와 의의에 대하여
본 글은 칸트의 주저인 『순수이성비판』 Immanuel Kant 저· 백종현 역,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 아카넷, 2015, 이후의 모든 인용은 이 번역본의 쪽수로 표기하겠다.
의 A,B판의 머리말과 B판의 서론을 통해서 칸트가 가졌던 문제의식과 그 문제의식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인 초월철학의 성격을 다루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인간의 이성은 어떤 종류의 인식에서는 특수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 인간 이성은 이성의 자연본성 자체로부터 부과된 것이기 때문에 물리칠 수도 없고 그의 전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어서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들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KrV, 165쪽
위의 글은 A판 머리말의 첫 문단이다. 칸트는 이를 통해 이 책에서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것이 인간 이성에게 자연적으로, 불가피하게 부과되지만 인간의 이성으로써는 해결할 수 없는 형이상학에 대한 것임을 드러낸다. 형이상학은 자칭 무차별주의자들에게 멸시 당했지만 인간의 자연본성이 무관심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서 우리가 무관심할 수 없다. 칸트는 이러한 무관심이 “이제 더 이상 사이비 지식에 자신을 내맡기지는 않으려는 시대의 성숙한 판단력에서 비롯한 것(KrV, 168쪽)”이라고 보고 자신이 그런 시대에 이성을 위한 하나의 법정을 세운다고 말한다. 그 법정이 바로 순수이성비판이다. 칸트는 이 법정을 통해 “정당한 주장을 펴는 이성은 보호하고, 반면에 근거 없는 모든 월권에 대해서는 강권적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의 영구불변적인 법칙에 의거해 거절할 수 있을 것을 요구(KrV, 168쪽)”한다.
B판 머리말에서 칸트는 이성이 하는 일인 학문이 안전한 길을 걷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 성과로 알게 된다고 말한다. 학문이 안전해야 그 일을 하는 이성도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칸트가 보기에 논리학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완성되어 확실한 학문의 길을 걸어왔다. 그 이유는 논리학이 “오로지 모든 사고의 형식적 규칙들을 상세히 서술하고 엄밀하게 증명하는, 바로 그런 학문(KrV, 177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리학은 모든 학문을 위한 예비학이라고 할 수 있다. 논리학은 내용을 다루지 않고 오직 형식만을 다루기 때문에 지식을 획득하는 학문은 아니다. 논리학이 학문의 전제가 되지만 학문의 안전성을 보기 위해서는 지식을 획득하는, 객관적인 학문들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런 학문들을 봐야 한다. 그런데 그 객관적인 학문들에 있는 이성의 인식은 두 가지, 규정함과 현실화함이 있다. 전자는 이론적 인식이고 후자는 실천적 인식이다. 칸트는 순수한 선험적 인식인 전자와 경험적 인식인 후자가 섞여선 안 되고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학은 오랜 시간 학문의 안전한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어떤 혁명에 의해서 가능해 진 것이다. 그 혁명은 예를 들어 어떤 도형을 볼 때, 그 도형을 탐색해서 개념을 알아내는 게 아니라 관찰자가 자신이 가진 개념을 그 도형에 집어넣어 필연적인 결론을 끄집어내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자연과학은 수학에 비해 훨씬 경험적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자들도 자신들의 이성이 이성 안의 기획에 따른 결론만을 산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이성 자신이 자연 안에 집어넣은 것에 따라서 그가 자연 안에서 배워야 할 것(KrV, 180쪽)”을 통찰했음으로 자연과학은 학문의 안전한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형이상학은, 학문의 안전한 길에 들어설 수 없었다. 칸트는 형이상학이 학문의 안전한 길에 들어서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학문들의 사고방식 변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제까지 사람들은 모든 우리의 인식은 대상들을 따라야 한다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대상들에 관하여 그것을 통해 우리의 인식이 확장될 무엇인가를 개념들에 의거해 선험적으로 이루려는 모든 시도는 이 전제 아래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 번, 대상들이 우리의 인식을 따라야 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우리가 형이상학의 과제에 더 잘 진입할 수 있겠는가를 시도해 봄직하다. 이런 일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대상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전에 대상들에 관해 무엇인가를 확정해야 하는, 요구되는바 대상들에 대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에 더 잘 부합한다. 이것은 코페르니쿠스의 최초의 사상이 처해 있던 상황과 똑같다. KrV, 182쪽
이렇게 해서 후세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리게 된 사고방식의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서 우리의 인식은 대상을 따라야 하는 것에서 대상이 따라오게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또한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경험이란 대상이 우리에게 인식방식으로 들어오기 전에 내가 대상에게 먼저 줄 수밖에 없는, 선험적으로 전제할 수밖에 없는 지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대상들은 선험적 인식에 따라서 우리에게 경험으로 직관되게 된다. 칸트는 이를 통해 형이상학에 학문으로서 안전한 길을 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런 사고방식의 변경에 따라서 사람들은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을 아주 잘 설명할 수가 있고, 또한 더 나아가 경험대상의 총체인 자연의 근저에 선험적으로 놓여 있는 법칙들이 만족스런 증명을 갖추도록 할 수 있으니 말이다”, KrV, 184쪽
선험적 인식과 경험적 인식의 구별에 대해서는 B판의 서론에서 다시 다룬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의 인식은 분명히 경험과 함께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의 인식 모두가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경험(Erfahrung)이 감각을 통해 수용한 질료들에 이성 자신의 인식 능력을 더해 산출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인식은 감각자료를 받아들이는 경험적 인식과 그에 앞서는, 모든 경험적인 것이 제외되고 또 거기로부터 독립된 선험적 인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선험적 인식과 경험적 인식을 구별해 주는 것은 바로 필연성과 보편성이다. 경험적 인식은 우리에게 어떤 것이 어떠하다는 정보를 주긴 하지만 그것의 필연성을 주진 못한다. 또한 경험은 귀납적 방법으로 인해 비교적인 보편성만을 주지 엄밀한 보편성을 주지는 못한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의 이성은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넘어간, 경험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한다. 순수 이성의 이런 특성은 불가피하게 신, 자유, 영혼과 같은 문제들을 인간에게 부여한다. 종래의 사람들은 이 과업을 이성에 대한 아무런 비판과정 없이 수행했는데, 그 이유는 수학적 인식을 형이상학적 인식과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학은 비록 순수한 이성이 관여하긴 하지만 직관에 현시될 수 있는 학문이다. 즉, 형이상학처럼 완전히 경험으로부터 독립된 순수이성의 선험적 인식 영역이 아니다. 종래의 철학자들은 수학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기초를 먼저 쌓지 않고 건물을 올리는 오류를 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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