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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효율 평등 생명의 경제학1

 1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효율 평등 생명의 경제학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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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효율 평등 생명의 경제학1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기독교에서 구원의 핵심 의미는 ‘벗어남’이라고 한다. 이집트에서 강제적으로 노동을 당한 이스라엘 노예들에게 구원이란, 강제노동과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이었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구원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업과 자본의 노예가 되어 스스로의 노예성에 대해 자랑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어느 40대 남성이 빚 독촉에 시달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크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찌든 세상에서 현대인들의 바람 역시 노동과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본다. 다른 점이 있다면 현대에는 희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의 순리보다는 인위적 체계 속에서 ‘빨리빨리’를 외치고 속도만을 강조하며, 인간이라기보다 기계적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꿈과 희망을 좇는 것조차 사치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출발선부터 다른 누구에겐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 주변에는 그렇다. 나 또한 그렇다. 친구들이 학자금 대출을 스스로 갚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하는 모습을 보면,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 내가 부끄럽고 부모님께 죄송스럽다. 일주일에 나흘은 ‘이렇게 학교 다녀서 졸업해봤자 빚만 늘어날 텐데, 자퇴 해서 기술을 배울까’란 생각을 진지하게 한다. 내가 이 정도인데, 더 한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현대사회는 소득격차가 날로 심해지고, 빈부격차도 날로 심해진다. 빚을 지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서 빚을 진 사람에게 한없이 모질다.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사는 모습을 추구하는 복지국가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인권보다 채권을 중요시한다. 우리는 헌법으로 인권을 보장받고 있으면서 합법적으로 채권이 인권을 이기는, 헌법에 기초한 민주 국가에 산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일이 늘어나면 빚도 늘어나는 노예의 삶에서 자유로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빚이 생기면 채무자라는 빨간 딱지와 채권자의 합법적 폭력에 얽매여 살아가는 것에서 해방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하기를 포기한다. 기대 자체를 하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제도는 힘든 삶에 허덕이는 자들을 위한 것들이다. 헌금은 세금이고 안식일은 노동자의 휴일보장제도이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재산 소유에 제한이 있고, 빚이 아무리 많아도 탕감과 재시작의 기회가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낸 만큼 복지가 돌아오지도 않고, 가진 사람들은 가진 만큼 누린다. 빚은 한 번 생기면 회생하기 어렵다. 철저히 부자들만을 위한 사회에서 부자들은 법적으로 보장된 채권을 온몸에 장착하고 끊임없이 가난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 책임을 가난한 자들에게 돌린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와 복지국가의 실현에 대해 기대 자체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것 같다.
중학교 때까지 언니와 함께 교회에 다녔다. 매주 헌금을 내야 했는데, 그 돈이 너무 아까웠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구절을 머릿속에 눌러 담으며 저 돈은 꼭 필요한 누군가에게 전해질 것이라고 억지로 생각해 봐도 아깝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사실 그 돈은 작게는 적은 금액으로 제공되던 점심식사값과 활동 시간에 나누어 주던 간식, 그리고 각종 행사 때 주던 여러 상품들부터 크게는 교회 발전을 위한 건축금으로 쓰였을 것이다. 능력이 되는 만큼 알아서 내고 후에 모두가 혜택을 받는, 이토록 정직하면서 좋은 복지가 또 어디 있을까! 지독한 현대 사회에 살아가면서 교회라는 공간 안에서라도 참된 복지와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을 수 있었음에 감사해야 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쁜 면들을 많이 접해서 그런지 여전히 아까운 마음은 떨칠 수가 없이 사실이다.
아빠가 회사를 그만두시면서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대신 엄마가 나가기 시작하셨다. 헌금에 대한 그러한 생각은 엄마의 십일조로까지 이어졌다. 아빠가 회사를 그만두셨는데 엄마는 저 돈을 교회에 왜 갖다 바치는 것일까? 왜 없는 돈까지 다 내는 걸까. 기독교와 문화 강의와 그에 관한 여러 글을 읽고 난 지금의 시각으로 보니 엄마는 우리 가정 안에서만이라도 희년을 맞이하고 싶으신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빚은 계속 늘어나고, 나라는 가진 자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엄마는 자신의 안식을 보장해 주는 무언가가 필요하신 것 같다.
맞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희년과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우리조차 우리 스스로를 노예로 자처하고 나서는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진정한 안식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날이 올까? 주빌리 은행은 그 의문에 희망적인 길을 제시해 준다.
미국의 롤링 주빌리 프로젝트의 영향으로 설립된 주빌리 은행은 기독교의 희년에 그 모티브를 두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14년에 시민단체를 주축으로 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사실상 불어난 모든 빚을 갚을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실채권에 대한 책임을 모두 떠맡아야 하는 지금의 사람들에게 모든 빚에서 해방되어 새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은 매우 희망적이면서 아직은 비현실적인 얘기이지만 이 주빌리 은행의 탄생으로 그것이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 나의 빚을 자발적인 누군가가 조금씩 짊어지고,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어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가 회복될 수 있을 것 같은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야 말로 정말 우리에게 구원이 아닐까 싶다.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최소한 모두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존재의 눈으로 기독교의 여러 제도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문제이고, 우리는 어떤 대책을 세워 그것을 해결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의 해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복지와 민주주의란 무엇이며 그 가치의 회복을 위해 가져야 할 사회적 제도와 개인적 태도는 어때야 하는지 깨닫고 국가가 우선하여 개선해 간다면 먼 옛날 노예들이 가졌던 안식과 희년의 기쁨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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