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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 문화대혁명이 낳은 최대의 희생자 홍위병 - 중국문화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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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화대혁명 - 문화대혁명이 낳은 최대의 희생자 홍위병 - 중국문화의 이해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문화대혁명

- 문화대혁명의 희생자 ‘홍위병’
문화대혁명의 추동력은 빛 바랜 녹색의 군모와 군복를 착용하고, 팔뚝에는 홍위병 완장을 차고, 한 손에는 붉은 색의 모택동 어록을 쥐고 전국을 누비며 문화대혁명의 고조기를 이끌었던 ‘홍위병’에게 있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대중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내용의 이른바 대중이론은 본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활동 원칙이었지만 중국공산당, 특히 모택동에 의해 강력하게 실행에 옮겨졌다. 문화대혁명 기간동안 이 대중노선의 최일선에 나선 것이 바로홍위병이었다. 굳이 그 말뜻을 풀어 본다면 사회주의 이념(紅)을 지키는(衛) 병사(兵)라고 할 수 있겠다.
홍위병이라는 낱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베이징대에 대자보가 나붙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6월초, 베이징 칭화대학 부속중학교에서였다. 베이징대 대자보를 지지하기 위한 이 학교 학생들의 자체 조직이 내건 대자보 맨 뒤에 홍위병이라는 서명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흐름은 여러 관영 매체의 전파력에 힘입어 순식간에 중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모든 통제를권위주의적‘수정주의적이라고 비판하는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를 벌였다.
당시 홍위병들은 무료로 열차를 탈 수 있었고, 숙소와 식사도 현지 정부로부터 제공을 받으며 전국을 누빌 수 있는 특혜를 받았다고 한다. 이처럼 막강한 모택동의 권력을 등에 업은 홍위병들은 소위 수정주의자, 혹은 반혁명분자를 색출하고 공격하는 와중에 심한 구타와 고문을 일상적으로 행하였으며 그 결과 사망자도 속출하였다. 한 여성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의 젊은 청년들이 다함께 소리를 지르며 한 노인을 반혁명분자라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마구 구타를 했다는 것을 친구를 통해 듣게 되었고, 자신 역시 홍위병에 속해있었지만 그러한 행동은 정말 잔인하다고 생각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만약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그들을 제지할 용기는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이 같은 혼란 속에서 정제되지 않은 개인적 감정이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쏟아부어진다고 해도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홍위병의 무분별한 폭력에 의하여 1966년 8월과 9월에 걸쳐 북경시에서만 1,000여명이 사망하였을 정도였고 또한 대부분의 국가와 당의 지도부들이 홍위병에게 체포되어 거리로 끌려 다니고, 심문을 받으며 자신의 반혁명죄를 고백하는 것은 일상사에 가까웠으며 봉건구습의 타파라는 미명 아래, 불상의 머리와 팔다리를 자른 뒤 봉건사상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적어놓고, 얼굴에는 모욕적인 선을 그어놓는 등 문화재에 대한 파괴 역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의 중국은 그나마 나름대로 역할을 하던 법과 제도가 완전히 무의미해지고 모택동의 한 마디가 바로 법이요 진리가 되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국가 기관이나 당조직도 모택동의 권위를 앞세워 몰려드는 홍위병들의 폭력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모택동은 문화대혁명 초기 기존 정치, 사회, 문화 구조에 대한 파괴가 주된 관심이었기 때문에 홍위병들에게 파괴와 반란의 논리를 제공하였고 결국 극단적인 폭력을 유발하였다. 사실 당시 중국의 사회제도는 많은 문제점이 있었고, 소련의 변화를 보면서 나름대로 사회주의 제도의 문제점을 느꼈던 모택동이 새로운 사회주의적 길을 찾으려고 하였던 것은 나름대로 선각자적인 의미도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홍위병들의 기존 제도에 대한 반발과 문제제기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발상과 문제제기가 무정부적인 상황과 극단적인 폭력으로 발전하였던 것에 있고, 이를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 바로 모택동에 대한 개인숭배였던 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무조건적으로 모택동에게 영원한 숭배를 맹세하던 홍위병들은 훗날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모택동에 의해 기세가 꺾이고 만다. 1968년 7월 마오쩌둥은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으로 홍위병5대 영수를 불러들인다. 그는 이들을 향해 문화대혁명을 2년 동안 해왔지만 자네들은 첫째, 투쟁하지 않고 둘째, 비판하지 않고 셋째, 개혁하지 않았다고 꾸짖었다. 모택동은 이어 투쟁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네들이 소수의 대학에서 하고 있는 것은 무장투쟁이야. 이제 노동자나 농민병사주민 어느 누구도 환영하고 있지 않으며 자네들은 대중에게서 이탈돼 있어라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모택동의 홍위병에 대한 결별 선언이었다. 모택동은 이 자리에서 홍위병 지도자들에게 계속 폭력적인 활동을 할 경우 섬멸하겠다는 극언까지 했다. 모택동의 지시와 충동으로 학원을 뛰쳐나와 전국을 공포와 파괴, 살육과 탈취의 현장으로 몰아넣었던 홍위병들은 모택동의 갑작스러운 방향 변경으로 정치 표면에서 자취를 감춰야만 했고, 모택동을 보위하던 홍위병들은 말 그대로 용도폐기 된 채 정치적 소모품이자 희생자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궁벽한 시골로 하방되어 돌아오지 못한 채 과거를 숨기고 살아가야만 했다.
문화대혁명은 대규모 군중운동의 연속이었다. 군중들은 한 손에는 모택동 어록을 들고 다른 한 손엔 “목숨바쳐 모주석을 보위하자”라는 식의 내용이 담긴 플랜카드를 들고 매일같이 거리로 뛰쳐나와 문화대혁명을 통한 새로운 사회주의사회 건설을 부르짖었다. 모든 생산활동은 정지되고 파괴와 비난은 미덕이 되었으며, 전 인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치학습에 시달려야만 했다.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의 어린 학생들은 우리가 중학교에서 국,영,수를 필수적으로 배웠던 것과 같이 모택동 주석 저작 학습이나 구 교재, 학교제도에 대한 비판 등을 필수적으로 학습해야만 했다.
이처럼 문화대혁명의 테두리를 확정하고 이를 직접 촉발한 사람은 모택동이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을 논함에 있어서 모택동의 카리스마를 등에 업고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홍위병을 조직해 이들을 조종하고 투쟁을 벌이도록 했던 모택동의 처 장칭과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한다의 요문원, 문화대혁명을 지지하는 급진적 무장투쟁파 조직을 이끌어 두각을 나타냈던 왕홍문, 상하이시 당서기 출신 장춘교 등 이른바 4인방을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4인방이라는 이름은 이들이 엽검영 등이 주도하는 군부에 체포돼 문화대혁명이 사실상 종결되는 과정에서 정식으로 붙여진 것이고, 이전에는 보통 ‘상해방’ 으로 불렸었다. 결국 문화대혁명은 1976년 9월 모택동이 사망하고, 화국봉에 의해 모택동의 추종자인 4인방세력이 축출됨으로써 실질적으로 종결되었고, 공식적으로는 1977년 8월 제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그 종결이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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