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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일본인 학자가 본 제주인의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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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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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일본인 학자가 본 제주인의삶
내가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무서운 존재라는 생각에 과거이야기는 둘째 치고 근황 얘기조차 나누지 못했었다. 군대에 다녀오면서 아버지랑 대화를 조금씩 나누기 시작했고 이젠 아버지랑 이야기를 쉽게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은 아버지랑 밭일을 도와주러 가다가 동네에 있는 한 무덤을 보면서 말씀 하셨다. “야 저기 무덤이 무슨 무덤인지 알겠어?” 할머니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웃집의 한 무덤이었다. “글쎄요. 저희 과수원 근처긴 한데 떡 하니 이웃집 앞에 있는 걸 보니 아버지 지인분의 무덤 아니겠어요?” “아버지 친구네 집 묘인데 증조할아버지 친구분의 무덤이야”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아 증조할아버지요?” 어릴 적 얼핏 바다에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만 들었던 사실이 생각났다. 그 생각이 나면서 아버지께 그럼 저희 할아버지도 아버지를 오래 못 뵙고 살아가셨겠네요. 라고 물었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었다. 나의 아버지도 그렇고 할아버지 또한 그러 하셨다. 그 이유는 나의 증조할아버지는 해방 후 제주에서 터진 4.3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 현장을 피해 전주로 올라가시던 중 배에서 친구 분이 바다에 빠지셨는데 그 분을 구하시려다 같이 바다에 휩쓸려 돌아가셨고 나의 할아버지는 6.25전쟁을 참전하셨다가 다리 한쪽을 잃고 오셨다. 그 후유증으로 할아버지는 40대가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나의 아버지는 3남 4녀 중 6번째셨고 초등학교 4학년 때라고 하셨다. 지금의 제주는 평화롭고 자연경관이 좋은 곳으로 생각되어지고 나 또한 이런 제주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과거를 돌아보자면 정말 아픔이 가득한 땅이라는 생각뿐이다. 우리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의 세대 자체도 제주뿐만 아니라 한국역사 자체가 슬픔이지만 한국의 오지로 여겨졌던 제주의 슬픔은 더 큰 것 같다. 이 책은 우리들의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에 남의 일처럼 읽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제주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부분들이 있었는데 지금도 책에서 나오는 부분들에서 공감이 되는 이야기들이 몇몇 있었다. 우선 제주 여자들이 성실하게 또 악착같이 일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할머니가 생각났는데 나의 할머니께서도 여든이 되실 때 까지 과수원에서 감귤을 재배하며 살아가셨다. 가끔 일손이 없어 도와주러 간적도 있는데 할머니의 노동력은 정말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감귤을 따는 손놀림이며 과수원 옆에 하시는 농사일도 하시며 했던 일들, 할머니 앞이니 힘든 척은 할 수 없고 일을 시작하시면 지독하게 하셔서 몸이 고되었던 시간이 생각난다. 그렇게 일을 도와줬는데 고생했다며 그냥 빈손으로 보내셔서 더 기억에 남는다. 여든을 넘기시고 아버지가 할머니 건강걱정을 하며 농사일 아버지가 할 테니 그만 하시라고 했는데 밭을 가꿀 때는 항상 오셔서 같이 일도 하시고 잔소리도 남기시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들어가서 쉬라고 하셨지만 “집에 가면 할민 할 것도 없고 노는 것 보단 일허는게 좋으난 와쪄라며” 우리의 일에 더욱 채찍을 가하시곤 했다. 그때 나는 밭일이 처음이었고 그래도 좋은 모습 보이고 싶어 열심히 하긴 했지만 일도 안 해봐서 금방 지치고 할머니가 일을 너무 잘하셔서 많이 부끄러웠다. 아버지가 조금은 미숙하시긴 했어도 그래도 숙련된 모습들을 보여주시곤 했다. 어릴 때 했었던 일이라 손에 익는다는 말씀을 하셨다. 나의 어머니 또한 어릴 때 농사도 지어었던 이야기도 해주셨고, 일에 대한 부지런함은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식당일도 하시고 집안 잡일, 새벽에 일어나 매일 반찬 만드시는 일, 가족들 밥먹이는 일만 해도 기진맥진이실텐데 별 말없이 묵묵히 해내신다. 제주여성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버지가 또 다른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어릴 때 소를 끌고 밭을 갈던 이야기도 하시고 소 여물 먹이고 물가에 가서 소들 물 먹이고 그땐 수도가 없을때니 소가 먹는 물을 옆에서 같이 먹기도 했다고 하셨다. 또 집에선 그래도 어릴 때 땅이 많았던 집안이여서 물탱크가 있었는데 그 물탱크는 처마에 연결 되서 비가 올 때 물을 받는 역할을 했는데 거기 뚜껑 열어보면 쥐들도 물이 먹고 싶어서 기웃거리다 통에 떨어져 죽기도 하는데 더럽다고 안 먹을 수 있나 그 물을 먹으면서 컸다고 말씀하셨다. 촌에 살던 사람들이 왠만해선 탈도 안 나고 하는 게 어릴 때 그런 환경 속에 자라나서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 하셨다.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래도 자식 키운다고 정말 악착같이 밭에서 일하고 땅도 팔면서 사셨다고 한다. 또 증조할머니도 정말 악착같고 독하기 까지 하셨다고 하는데 주변 분들이 증조할머니께 담뱃불도 붙여주고 하셨다고 한다. 아마도 증조할아버지도 장손이셨기에 받은 땅이 많은데 일찍 돌아가셔서 그것을 유지하려 독해지셨던 것이 아닐까 라고 아버지가 이야기 해주셨다. 할머니들이 가장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으셨을지······. 윗세대들이 겪은 역사의 아픔이 야속하기만 하다.
아직도 조금은 남아있는 궨당문화. 이런걸 분석하고 왜 그런지 어떻게 관계가 되는지 분석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좁은 지역이라 그런지 한 다리 건너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우리 대학 동창들을 통해서도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금도 제주도살고 제주대학에 온 학번친구들은 서로 같이 공유하는 친구들이 꼭 몇 명씩은 있다는게 증거가 되겠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의 친구기에 정감 있게 대하는데 마을 공동체로 간다면 서로 일도 해준다는 별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어릴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가 있는데 맨날 보다보니 서로의 부모님도 왕래가 생기면서 서로 나눌게 있으면 챙기는 그러한 관계로 까지 발전했다. 아직은 촌이라서인지 제주도라는 문화가 남아있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표선 같은 시골에는 아직도 이러한 교류가 남아있다. 아버지의 고향은 표선에서 10분 거리인 온평리인데 고향에 있는 친척분이 결혼을 하게 되는 날이었다. 잔치를 여는데 책에 나오는 잔치처럼 정말 바다에가서 돼지를 잡고 다음날 고기를 나누고 그 집에서 잔치를 여는 곳에 가서 일손이 되었던 경험이 생각난다. 그런 잔치에 갔을 때 정감이라는게 느껴졌고 동네에 지나치시는 어르신들도 오셔서 술 한잔 기울이시며 분위기를 띄어주던 기억. 나도 결혼할 때 이런 잔치나 열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었다.
경조사의 일이야 별 고생이 아니란 생각에 대가없이 일을 도우지만 밭을 일구는 일을 할 때 구분 짓는 노동의 대가는 애매한 것이 맞는 것 같다. 너도 돕고 나도 도울 것이니 돈을 안 받다가 누군가 일이 생겨 다음 일이 필요할 때 못 오는 경우들이 생겨나며 마찰들이 일어나기도 했을 것 같다. 서로 주고받는 것이 정해진 법규가 아니라 정에 의한 주관적 판단이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해 본다. 그렇다고 친척이고 한 마을의 이웃인데 깔끔하게 해결하기 위해 지금처럼 돈을 챙겨주는 것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친척들의 경조사가 일에 참여할 때면 고생했다고 돈을 챙겨주시곤 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버지는 친척에 대한 우애가 깊으셔서 명절이나 제사의 일이라면 찾아가고 또 불러 모으시곤 하신다. 상에 둘러앉아 관심사, 과거이야기 등을 나누며 자리를 나누신다. 어려웠던 시절들을 회상하며 아픔들이나 힘들었던 경험들을 친척들과 함께 나누고 털어내신다. 힘든 것이 있다면 나누고 함께 있는 자리에 함께하려 서로가 노력한다. 이처럼 좋은 것들이 있다면 이어가려는 노력이 나에게서도 나오고 또 후세에도 이어가며 정이 있는 공동체성이 남아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