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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쇼 - 공리주의와 의무론에서 바라본 진실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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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퀴즈 쇼 - 공리주의와 의무론에서 바라본 진실의 가치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퀴즈 쇼
공리주의와 의무론에서 바라본 진실의 가치
1
서 론
‘퀴즈쇼’라는 영화를 보고 다소 진부해 보였던 ‘진실의 가치’에 대해서 여러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께서 꺼내 든 카드인 진실하기는 인간의 기본 의무인가? 어떠한 순간에도 진실해야 하는가? 왜 그렇게 진실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가? 에 대한 공리주의적 입장과 의무론적 입장사이의 시각 차이를 중심으로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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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론
공리주의(功利主義, utilitarianism)는 공리성(utility)을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하는 사상이다. 곧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위가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늘리는 데 얼마나 기여하는가 하는 유용성과 결과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넓은 의미에서 공리주의는 효용·행복 등의 쾌락에 최대의 가치를 두는 철학·사상적 경향을 통칭한다. 하지만 고유한 의미에서의 공리주의는 19세기 영국에서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 제임스 밀(James Mill, 1773~1836),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사회사상을 가리킨다.
공리주의는 인간을 언제나 쾌락(행복)을 추구하고 고통(불행)을 피하려 하는 본성을 지닌 존재로 파악한다. 인간행동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기준도 이러한 공리적 인간관에 기초하는데, 이에 따르면, 인간의 쾌락과 행복을 늘리는 데 기여하는 것은 선한 행위이지만, 고통과 불행을 크게 하는 것은 악한 행위이다. 나아가 사회의 행복을 최대로 하려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가능한 한 많은 행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공리주의의 목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the greatest happiness of the greatest number)’을 실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행위의 선악을 쾌락의 기준으로 정하는 이러한 원리를 ‘공리의 원리’(Principle of utility)라고 한다.
그러나 ‘퀴즈쇼’가 다수의 대중을 학습시키는 효과가 있으니 공리주의적 관점의 프로그램이라고 했다가는 밴담이 와서 진짜 울고 갈 지경일 것이다. 왜냐하면 공리주의의 근저에는 진실이 녹아있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공공의 복리를 증진시켜야 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퀴즈쇼’에는 그런 진실이 없다. TV쇼의 거짓으로 학습 흥미를 높이는 것은 진정한 공리주의가 아니다. 이처럼 공리주의도 진실을 상당히 엄호하는 입장에 서 있다. 다만 어떠한 순간에도 진실해야 하는가라는 명제 앞에서는 칸트의 의무론과 입장이 갈린다. 칸트의 절대주의적 의무론에 따르면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한 거짓말도 정언명령을 위배한 것이 된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규범은 "너의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 원리에 타당하도록 행위 하라."라는 제1격률과 "모든 인간을 단순히 수단으로서만 대우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라"라는 제2격률 모두를 위배하므로 정언명령일 수 없다. 반면에 "거짓말을 하지 말라"라는 규범은 두 격률 모두를 위배하지 않으므로 정언명령이다 즉, 공리주의 입장에서는 때에 따라서 진실을 말하지 않아도 그것이 공리성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수용될 수 있지만, 의무론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진실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공리주의에서 인정되는 거짓을 말할 수 있는 ‘때’란 어떤 경우일까? 그것은 아마도 거짓을 말하는 사람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사이의 관련성에 기반을 둘 것이다. 예를 들어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게 의사가 진실을 말할 경우,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생의 마지막을 정리할 시간을 주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만큼의 정신력을 가진 경우라면 그 환자와 의사사이의 관련성에서는 거짓을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히려 진실을 이야기 하는 편이 환자 개인의 공리성 측면에서 수용될 수 있는 가치인 것이다. 반면에 그런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더 큰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고 마지막 순간까지 괴로워하면서 인생을 허비할 만큼의 정신력을 가진 환자에게는 그 관련성의 측면에서 봤을 때, 절대로 진실을 말하면 않 될 것이다. 이를 조금 확대하면 국가차원에서도 적용이 가능하다. 제 2차 대전의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의 경우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독일은 자신들의 잘못을 철저히 반성하고 그 죄 값을 낱낱이 밝히면서 주변국은 물론이고 자국민에게도 그들의 ‘불편한 진실’을 솔직히 토로했다. 반면에 일본은 정반대의 행동으로 모든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대동아 전쟁이라는 둥의 어설픈 가짜 이론을 펼치고 주변국에게 불쾌감을 주고 자국민을 속이고 있다. 이 역시 거짓을 말하는 사람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사이의 관련성에 기반을 둔 것이다. 즉, 독일은 그 만큼의 성숙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일본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성숙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일은 진실을 말하고 일본은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 다시 영화로 돌아 와서 생각해 보자. 영화에서 찰스 반 도렌은 처음 주인공 제의를 받았을 때, 그에 응하지 말았어야 한다. 그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다른 분야에서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성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그는 아마도 공리주의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자신의 행위(거짓으로 답을 맞히는 행위)가 자신에게도 부와 명예를 주지만 공리성에도 큰 지장이 없다고 생각했다. 즉 거짓을 말하는 사람(본인)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대중, 시청자)사이의 관련성에 기반을 두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이후 문제가 되고 자신의 행위가 공리를 파괴학고 가족관계의 부적절한 결과를 야기하는 관련성에 기반을 두었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청문회에서 그의 행동에 대한 통렬한 반성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