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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도덕교육 - 공리주의 -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 6 나와 우리 - 빈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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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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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초등도덕교육1
공리주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1.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우리 주변에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숱하게 볼 수 있다. 우리는 통상 이기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을 ‘부도덕하다’ 고 판단하면서, 이에 반해 간혹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보면 그를 ‘도덕 군자’라고 여긴다. 이기적과 이타적 사이의 갈망. 거기에서 혼동을 느끼게 되었다. 한때 “줄을 서시오”라는 유명한 명장면과 대사를 보여준 드라마 ‘허준’을 본 적이 있는가?
동의보감을 집필한 허준이 조선의 최고 명의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스승 유의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최고의 의술을 갖고 있던 유의태 문하에는 그의 아들 유도지와 허준이 있었다. 그 둘은 국가 고시, 즉 내의원 취재에 응시하기 위해 한양으로 상경하는 중 주막에 들렀다. 그곳에는 내의원 취재에 응시하러 한양에 올라가는 많은 의원들이 찾아들었는데, 마침 유도지도 있었다. 오랜 여정이라 모두 피곤해서 막 잠에 빠질 무렵, 위독한 병을 고쳐줄 것을 간청하는 허름한 차림의 중년 부부가 있었다. 곤한 잠을 깬 대부분의 의원들이 밖을 내다보는 가운데, 노인의 병세를 듣던 유도지는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는 듯 몇마디 대화를 나눈뒤, 처방전을 써주고 가져가라고 한다. 그러나 중년 부부는 급히 처치를 요하는 위급 상황인데다 마을 의원이 멀리 타관에 가 있는 상태였고, 더구나 살림살이가 곤궁해서 처방전의 약재를 구입할 수 없는 형편임을 알리면서, 잠시 와서 침이라도 놔주기를 간곡하게 부탁한다. 이에 유도지는 한양으로 가야할 몸임을 밝히면서 단호히 거절한다. 이때 허준이 말없이 옷을 챙겨 입고 나선다. “넋빠진 놈이구마. 돈 한 푼 못 받을걸 번연히 알면서 미쳤다고 십 리씩이나 왔던 길을 되돌아가, 쯧쯧.” 비아냥 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가서 병을 고친다. 돈도 안받고 병을 고쳐주는 의사가 있다는 소문은 금방 퍼지고 허준을 붙들었다. 한양서 내려오는 길에 다시 들르겠노라고 약속했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누구는 병을 봐주고 누구는 지나치느냐는 아우성에 허준은 고향에서 노모와 아내가 기대하는 합격을 저버리고 있다는 느낌에 뿌리치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의원으로서 그 손길을 애틋하게 기다리는 무지렁이 백성들의 염원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결국 3일밤을 꼬박 새고 나서야 한양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이미 과장에서는 시험중이었고, 더군다나 전날 취재 수험표인 시권을 받지도 못한 상태였다. 결국 발길을 돌려 다시 그들의 병을 돌보아 주었다. 한편, 병자들의 손길을 박절하게 외면한 유도지는 합격하였다.
이 이야기에서는 선명하게 대비되는 두 인물 유도지와 허준을 보게 된다. ‘윤리적 이타주의’에 의하면, 한 행위자가 타인의 이익을 최대로 증진시키는 행위를 수행할 때 그 행위는 도덕적으로 옳거나 의무적이 된다. 이런 엄격한 도덕적 표준에 따르면, 명확하게 허준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옳지만, 유도지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그르다. 그러나 도덕적 표준을 달리하는 윤리적 이기주의에 의하면, 유도지의 행위는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 된다. 왜냐 하면 윤리적 이기주의는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에게 최대로 이익이 되는 행위를 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들에게는 유도지의 행위보다 허준의 행위가 마땅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타주의는 너무 높은 이상적 도덕 이론에 머물기 때문에 현실성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동시에 나의 행위에 영향을 받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최대의 좋음을 낳을 경우가 가능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일견 옳은 주장일 수 있다. 이렇게 이타주의가 너무 높아서 실현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인다고 여기면서 이기주의를 떠나고자 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공리주의로 이행 할 수 있다.
2. 공리주의에 대하여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의 한계를 느끼며 공리주의라는 새로운 접근을 시작하게 되었다. 윤리적 이기주의는 사람들 각자가 자기 자신에게 최대로 이익이 되는 행위를 하라는 견해로서, 이때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행위가 타인의 침해하거나 불이익을 줄 때 조차도 그렇게 하라고 요구한다. 반면 윤리적 이타주의는 나에게 불이익이 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행위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기주의나 이타주의와 달리 공리주의는 나의 행위가 나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서 동시에 나의 행위에 영향을 받는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최대로 이익이 되도록 행위하라고 요구한다. 물론 이때 나의 행위로 인해 나 개인은 많은 이익을 얻지만 다수의 다른 사람들이 불이익을 받는다면, 그 행위는 하지 말 것을 요구받게 된다.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에게 최대 행복을 가져다주는 행위를 옳거나 의무가 되는 것으로 여긴다. 공리주의는 유용성의 원리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 원리는 영향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악에 비해 선을 최대화하도록 행위 해야 한다는 원리다. 이때 유용성의 기준은 결과로서의 선(또는 좋음)이다. 그렇다면 옳고 그름을 재단하는 목적으로서 좋음은 무엇인가? 달리 표현해서 ‘본래적 선’은 무엇인가?
예컨대 네덜란드의 한 소년이 방죽에 생긴 구멍으로 인해 둑이 무너질 것을 염려하여 자신의 손으로 그 구멍을 막은 행위는 옳은 행위이다. 이 경우 공리주의자에 의하면, 추위에도 불구하고 손으로 구멍을 막는 소년의 행위는 네덜란드 전 국민에게 고통이 가해지는 것을 막고 즐거움을 가져다준 것이기 때문에 옳다. 이 소년이 행한 행위의 옳음 여부는 네덜란드 국민의 선에 도구적으로 기여한데 있다. 이때 옳은 행위는 도구로서 목적에 기여한 것이기 때문에 도출적 가치를 지니지만, 네덜란드 국민의 선은 그 자체가 목적인 것으로서 비도출적인 ‘본래적 가치’를 지닌 것이다. 공리주의에서 다른 무엇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 목적으로 추구되는 본래적 가치, 즉 본래적 선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벤담은 그것이 ‘쾌락’이라고 말하고, 밀은 ‘행복’이라고 말한다. 이런 까닭에 벤담의 공리주의를 쾌락공리주의라고 하고, 밀의 공리주의를 행복공리주의로 구분하여 말하기도 한다. 쾌락공리주의는 어떤 행위가 쾌락을 초래한다면 옳지만, 고통을 가져다준다면 그르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행복 공리주의는 어떤 행위가 행복을 초래하면 옳지만, 불행을 가져다주면 그르다고 한다.
유용성의 원리와 이해 관심 평등의 원리를 결합시키면, 공리주의의 기본 규범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각 행위로 인해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의 이해 관심을 고려하여 평등한 이해 관심을 평등하게 간주하면서 우리는 악에 비해 선을 가능한 한 최대화하도록 행위해야 한다. 이렇게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좋음을 추구하는 행위를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로 설정하기 때문에, 개인의 좋음을 추구하는 윤리적 이기주의에 비해 훨씬 윤리적이고 바람직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공리주의에도 다음과 같은 문제점은 있다.
첫째, 나 개인이 아닌 모든 사람의 좋음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기주의에 비해 높은 도덕적 점수를 따고 있지만, 쾌락주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부 불협화음의 소지를 안고 있다. 왜냐 하면 쾌락의 추구는 언제든 나의 쾌락으로 미끄러지기 쉬워서, 이기적 경향을 띠는 쾌락주의와 이타적 성향을 띠는 최대 다수의 원리가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벤담의 양적 쾌락주의는 수량화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도덕적 옳고 그름 여부를 판단하기 쉬운 장점을 지니지만, 인간의 도덕을 게걸스럽게 양에 만족하는 돼지의 도덕으로 격하시켰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반해 밀의 질적 쾌락주의는 실추된 공리주의를 다시 인간의 도덕으로 격상시켰다는 장점을 갖지만, 쾌락의 질을 판단해야 할 또 다른 도덕 원리를 요청한다는 점에서 단일한 쾌락주의를 이탈하게 되는 문제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