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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어학 고백이라는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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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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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백이라는 제도
가라다니 고진
1.
일본 은 고백의 형식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것은 단순한 고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형식이었고, 오히려 이 형식이 바로 고백해야 할 을 만들어내었다. 좁은 의미의 고백을 아무리 부정하고 극복한다 해도, 오히려 그만큼 더, 상처 받지 않은 채로 이 형식, 즉 표현해야 할 것(내면)과 표현된 것의 이분법은 남아있다. 작품의 자립적인 공간을 형성할 수 없었던 일본의 사소설을 본다면 메이지 20년대 초에 씌어진 후타바테이 시메이의 『뜬구름』 쪽이 훨씬 나중에 씌어진 소설보다 더 서양적인 의미의 소설을 실현했으며, 그 후에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가 그것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에 의해 방향이 비틀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사적인 조망은 표현해야 할 가 표현에 앞서 존재한다는 생각, 즉 표현해야 할 자기와 표현된 것의 이분법이다. 이 이분법은 고대 일본 문학의 경우에까지 확장된다. 고백이라는 형식 또는 고백이라는 제도가 고백해야 할 내면 또는 라는 것을 만들어낸 것이다. 문제는 무엇을 어떻게 고백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 고백이라는 제도 자체에 있다. 감추어야 할 것이 있어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고백한다는 의무가 감추어야 할 것을 또는 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은 제도와 마찬가지로 과 이 아닌 새로운 을 형성한다는 것, 또 언문일치가 확립되면 곧바로 그 사실이 잊혀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백이라는 것은 단순히 죄를 고백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제도인 것이다. 일단 성립한 고백이라는 제도 속에서 처음으로 감추어야 할 일이 생기며 나아가 그것이 제도라는 사실이 의식되지 않는 것이다. 다야마 가타이는 「이불」에서는 참회해야만 하는 일을 고백하지 않고 시시한 것을 고백한다는 것, 거기에 이라는 것의 특수성이 있다. 가타이가 고백한 것은 추한 이 아니라 추한 이었고 사실은 있지도 않았던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것이 이라는 것일까. 가타이가 고백하려고 한 이란 이미 이라는 제도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이라는 것이야말로 바로 고백이라는 제도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은 아닐까. 가타이는 이라는 선험적인 존재가 아닌 그 자체를 고백이라는 제도 안에서 보게 된다. 이라는 것은 항상 그 물질적인 기원을 망각시킨다. 가타이는 을 썼고 을 쓰지 않았다고 시마무라 호게쓰는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성경 1) 「마태복음」, 5장 27~ 32절, 간음에 대한 구절
에서 간음이라는 이 아니라 을 문제시한 것은 기독교적인 도착이다. 여기에 엄청난 전도가 존재한다. 이러한 의식은 어디에선가 끓어오르는 욕정을 항상 주시해야만 한다는,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 또는 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는 이미 가난하고 육체는 이미 아래에 존재한다. 가타이의 「이불」은 처음으로 을 그렸다. 일본 문학에서 나타난 성과는 완전히 다른 성, 억압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게 된 성이 그려졌다. 가타이는 을 고백했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고백이라는 제도가 그러한 성을 찾아낸 것이다. 「이불」에는 고백, 진리, 성 등 세 가지가 결합되어 나타났다. 서양 자체를 구성해 온 전도의 힘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
메이지 40년대에 가타이, 도손 등이 을 시작하기 전에도 이미 고백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을 만들어내는 전도가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이다. 가타이나 도손 등이 한때 기독교에 입교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기독교라는 것이 잊혀 졌을 때 바로 기독교적 전도가 되살아나는 것이다. 하쿠초는 서구 사회는 언뜻 보기에 기독교에서 동떨어져 있어도 실은 구석구석까지 기독교에 의해 만들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하고 있다. 서구의 가 설령 반기독교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기독교 내부에서 생긴 이라는 사실이다. 에 사로잡힌 자가 그 내면을 으로 생각한다면, 그는 부지불식간에 이미 기독교적으로 전도된 세계를 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을 읽는 일 자체가 를 초래한다. 교회를 대신해서 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연애로 현실적 공간을 형성해 갔다. 일본의 근대 문학은 하려는 의지와는 다른 원천에서 발생 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글자 그대로 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3.
왜 이 시기에 기독교, 그것도 프로테스탄티즘이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했는가. 이를 위해서는 어떤 사람들이 기독교를 향해 나아갔는가를 보면 된다. 히라오카 도시오는 『일본 근대 문학의 출발』을 야마지 아이잔의 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아이잔은 자신을 포함해 우에무라 마시히사, 혼다 요이치, 이부카 카지노스케 등 메이지 기독교도가 모두 옛날 막부 가신들의 자제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이라오카 도시오가 중시하는 것은 이란 평민과 다르지 않은 또는 그 이하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 의식은 평민일 수 없었던 무사족 속에서 생겨난 것이지 평민들 속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치무라 간조는 라고 쓰고 있다. 도래한 기독교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이미 무사일 수 없는 무사, 그러면서도 무사라는 사실 외에는 자존심의 근거를 찾아내지 못한 계층이다. 당시 문학작품에서 무사도가 기독교에 직결되는 것으로 간주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독교도라는 사실에 의해 의 영역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메이지 시대의 기독교가 그 자체로서 결코 대중화될 수 없었던 원인이기도 했다. 무사도의 윤리는 어디까지나 의 윤리이다. 현실적으로 일 수 없을 때, 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무사도가 그대로 기독교도로 바뀌어간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고대 로마 제국의 귀족 지식인층에 기독교가 침투해 들어간 과정과 유사하다. 기독교가 초래한 것은 임을 포기함으로써 으로 남아 있게 하는 정신적 역전이다. 그들은 주인임을 포기하고 신에게 완전히 복종함으로써 를 획득한 것이다. 기독교만이 그들의 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좋다. 확립의 변증법과 동력학을 여기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대적 는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로서 나타났던 것이다. 으로 보이는 것이 예외 없이 기독교를 매개로 하고 있는 것은 영향 등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체가 아니다. 거기에서는 이 있었던 것이며, 뿐만 아니라 그것은 , 즉 일종의 원한으로 가득한 음울한 심성에서 나온 것이다. 게다가 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을 시작했다. 하지만 기독교였기 때문에 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왜 항상 패배자만 고백하며 지배자는 고백하지 않는가. 그것은 고백이 왜곡된 또 하나의 권력 의지이기 때문이다. 고백은 결코 참회가 아니다. 고백은 나약해 보이는 몸짓 속에서 로서 존재할 것, 즉 지배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우치무라 간조는 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고백이라는 제도를 유지시켜 주는 것은 이러한 권력 의지이다. 현대의 작가는 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에 따라다니는 전도인 것이다. 오늘날의 작가가 좁은 의미의 고백을 배제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자체에 그것이 내제되어 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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