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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이투스라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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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헤라클레이투스라면 좋을 텐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어떤 사람은 과거를 기점으로 산다. 어떤 사람은 현재를 그리고 어떤 사람은 미래를 기점으로 산다. ‘~했으면 좋았을 텐데’, ‘~라면 좋을 텐데’, ‘~하게 되면 좋을 텐데’. 그리고 그 기점을 각자 정해서 자신의 삶의 추동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가정의 말은 어쩐지, 모두 현재의 나와 비교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이 비교의 대상이 되는 현재는 무엇으로 만들어질까? 과거로부터 흘러온 결과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미래를 통해 반추되어 나온 성공과 실패의 결과물인 것일까? 이 문제에 답을 달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 비교를 하는 주체이자 목적인 ‘나’에 대해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누구일까? 나라는 고정된 자아란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계속해서 변화되고 발전하고자 하는가? 때때로 우리는 변하지 않는 자아와 변화하는 자아 사이에서 혼돈을 느낀다. 어떠한 변화하지 않는 본질이 우리를 붙잡고, 그것을 토대로 우리가 살아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최종의 불안을 피할 수가 없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변화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집착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생각이 때로는 우리를 환경에 적응할 수 없도록 만들기도 한다.
헤라클레이투스는 우리의 이 혼란을 변화의 로고스로 해결하고자 했다. 그에게 세상은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는, 흐르는 물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법칙을 설명하는 최고의 원리를 불로 보았는데, 이 불의 순환 과정을 보면 우리의 동일성과 변화에 그가 어떠한 역설의 원리를 부여하고자 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에게 불은 공기가 되기도 하고 물이 되기도 하고 또 흙이 되었다가 다시 공기가 되었다가 물이 되고 또 불이 되는 순환의 과정을 겪는다. 그런데 이 순환의 과정에는 모두 하나 하나의 과정에 전체를 관통하는 불의 모습이 그 본질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전의 자연 철학자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전의 철학자들은 전체를 구성하는 개별적 요소들을 탐구함으로써 전체에 도달하고자 하였고, 또 이 개별적 전체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전체를 관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투스는 변화 아래 있는 동일성이 다양성 안에 있는 고정성보다 더 근원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은 서로 상충되는 원소, 혹은 개별적 존재들이 서로 충돌하며 조화를 이룬다는 생각보다는 그 충돌 속에 이미 조화와 합일의 통일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자아의 원리로 삼을 때 어떠한 자아가 탄생할까?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변화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환경과 맺는 직, 간접적이고도 지속적인 영향으로 인해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렇다면 고정된 자아가 없는데,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흄과 같은 사람은 이런 고정된 자아에 대한 집착을 기억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투스에 따르면, 우리는 움직임과 변화의 과정 그 자체이다. 비록 자아의 최종적인 발견과 자기의식, 통찰의 확실성이 존재할 수 없다 해도 우리는 그 변화 자체가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지 해야 한다. 그리고 결국 이 것은 우리가 이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바꿔나갈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지닌 존재임 인지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나는 이렇듯, 변화하는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내 변화의 추동으로 삼는 것일까? 이전의 나는 대부분 과거에 대한 후회의 반동으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몸소 체험하며 부딪혔던 삶이라 말 할 수 있다. 방향이 없어 이 길, 저 길 부딪히고 깨져 본 다음에야 나의 현재 경로를 바꿔 나갔다. 하지만,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응급처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최근에 들어서야 변화의 추동을 미래에서 찾는 실존주의자들의 입장과 내가 그 맥을 같이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자신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추동을 인간 정신 안에 있는 시간성, 특히 미래와 그 최종적 형태인 죽음을 통해 자신을 반추해 봄으로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삶의 끝을 알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불안과 마주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현재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의미에서다. 이는 결국 우리의 삶이 현재가 아닌 미래가 그 기점으로 역방향으로 흐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 나는 특히, 이 실존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부조리와 반항을 대표하는 카뮈의 실존주의가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그래서 실존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추동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삶은 그 자체가 부조리하다. 나는 타고나는 것 조차 내 선택이 아니라는 사실에, 내가 이 세상에 선택권 없이 기투되었다는 사실에 주체할 수 없는 화를 느끼며 어린 시절을 살았다. 나에게 신은 히틀러와 다를 바 없는 독재자였다. 그 정신 나간 독재자가 나의 삶에 자신의 형상을 불어 넣어 축복과 사랑을 위해 나를 창조했다는 사실이 제일 용서 할 수 없는 이기심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가 이 부조리를 부조리로서 바라봐야 할 그런 존재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부조리가 비단 나 자신의 존재에만 적용될 뿐이 아니라, 사회를,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원리 어디에나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세계의 순수 원리는 그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너무나도 인간적인 인간이 만들어 낸 세상의 한계란 부조리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부조리 속에서 세인의 삶을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반항할 것이냐의 선택에 서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결코 선택의 영역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하는 최대의 부조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부조리에 져버리는 삶이란 어쩐지 무가치하다. 살 수는 있다. 하지만 사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생존하는 것이다. 카뮈는 바로 이 선택의 기로에서 반항의 손을 들었다. (물론 이 반항은 폭력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 그는 그의 저서 에서 반항에는 개념의 정의와 그 한계, 예외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반항을 인생의 추동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비록 고정된 자아는 해체되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현재, 존재한다. 그 자체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며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삶에 기투되어 흘러간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의 선택은 바로 이 흘러감 속에 매 순간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번 선택할까 말까의 선택이 주어지지 않은 이 부조리 속에서 선택을 강요 당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추동으로 삼아 현재를 바꾸어 미래를 결정한다. 그리고 나는 그 부조리에 반항하는 것으로, 상식에 반항하는 것으로, 폭력에 반항하는 것으로 나의 삶의 추동을 삼는다.
에피쿠로스 Practice 3: 당신이 상상한 방법들, 당신 자신의 가치들과 상담 방법들이 당신의 고객에게 미치는 영향을 포함시켜라. 그들이 당신과 보낸 시간의 결과로써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최근, 상담인이 된다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상담에는 수많은 방법이 있고 그에 따른 매뉴얼이 존재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상담가에게 가장 중요한 본질은 무엇일까? 어떤 이는 일정한 거리감과 객관성, 분석적 능력이 중요하겠지만 나에게는 어쩐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이 없이는 이것이 불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결론에 다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상담자가 가진 가치 체계와 밀접하게 연관 될 수 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너무나 어려운 문제가 된다.
상담자에게 내담자가 찾아온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원하는 혹은 이미 알고 있는 대답과는 반대되는 해결을 위해, 자신의 생각을 정당화 하기 위해 찾아오는 것일 수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만약,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에 고통 받는 한 남자 혹은 한 여자가 나를 찾아 왔다고 하자. 상담인인 내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모태신앙이라고 가정했을 때, 나의 가치 체계에서 이 사람은 무엇으로 결론 내려질까? 나는 나의 가치 체계에 의거하여 그의 생각을 꺾어야 할까? 물론 대답은 아니다. 그가 나에게 찾아와 호소 하는 것은, 그가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뿐이다. 만약, 내가 그것을 단순한 정신병으로 취급한다면, 마치 과거의 정신과 의사들이 그들의 환자에게 전기 충격을 가하고 정신 병원에 넣었던 것처럼 그를 대한다면, 나는 그를 치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에게 동성애는 자신이 받아 들여야 하는 숙제인 동시에 부모와 자신을 받아주었던 사회에 충격을 던져주는 일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는 고통을 받고 있고 나는 이를 도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나의 가치 체계가 단순히 종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혐오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나는 이 내담자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바로 이러한 문제에 봉착했을 때, 우리는 우리의 가치 체계에 먼저 혼란을 느낀다. 그리고 상담자로서 어떠한 가치 체계를 스스로 정립해야 하는지 혼란을 느끼게 된다. 사실상 이런 일은 너무나 비일비재할 것이다. 동성애와 같이 현대에 와서는 널리 인식되고 이해되는 문제 외에도 혼란을 야기할 다양한 문제는 너무나 많이 존재한다. 학대하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그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 안락사를 원하는 병자와 가족과의 문제, 법이 해결 해 주지 못해 억울한 많은 사연들. 우리는 이와 같은 문제들 앞에서 무기력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철학상담의 의의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들 내담자에게 해 줄 수 있는 궁극적인 치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철학상담은 실제적으로 어떤 방법을 제시해 주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철학 그 자체와도 같다. 때때로 우리는 철학을 쓸데 없는 학문이며 비실용적인 학문이라고 매도할 때가 있다. 이것은 철학이 결과의 학문이 아니라 과정의 학문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오류인 셈이다. 철학상담도 마찬가지로 결과를 위한 상담이 될 수 없다. 이것은 과정 속에서 내담자가 스스로 자립하여 생각할 수 있도록, 내담자가 살아오면서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