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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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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학의 변천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동학의 변천사
1. 들어가는 말
천도교는 현재 동학을 계승한 거의 유일한 종단이다. 1905년 동학에서 이름을 변경하였고, 1910년대에 급속 성장하여 한때 교인 수가 300만에 달하는 조선 제일의 종단이었다. 천도교는 민족운동에도 가장 앞장섰다. 동학혁명은 물론, 1904년의 갑진개화운동, 그리고 3.1운동 까지도 천도교가 주도하여 일어난 거사였다. 3.1운동 이후 지도부의 대거 투옥으로 공백이 생긴 천도교는 신교육을 받은 젊은 엘리트 들이 주도했으며, 그들의 계몽은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된다. 의암의 사후, 교주제를 둘러싼 불협화음과 운동노선, 일제의 분열 책등에 의해 신구파와 분리와 교세의 약화를 가져왔으며, 분단으로 인해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후 서구화의 추세 속에 외면당하게 되고, 종교적 측면에서 볼 땐 민족운동 사회운동으로 너무 많은 희생을 치루면서 신앙과 수행을 게을리 한 이유로. 오늘날의 군소종단이 되고 만 것이다.
천도교 역사의 다양한 모습은 100년 전 암울한 시기에 우리 민족과 흥망을 같이 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하며, 그 과정에서 이전의 동학과 어떤 차이를 보이며 고민했는지,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천도교 운동의 성격은 어떤 것들이었는지 살펴보고, 이를 통해 ‘다시개벽’의 참뜻과 오늘날 우리 사회와 문명이 나가야 할 방향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2. 몸말
1) 동학에서 천도교로
해월의 처형 뒤, 동학교단은 의암이 교권을 장악하면서 재정비되고, 이 과정에서 동학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된다. 문명개화에 대한 지향의 싹틈을 볼 수 있는데, 서양의 근대 문명을 배워서 보국안민의 길을 찾으려 한 것이다. 의암은 민회를 설립하여 조선의 힘을 기르고 자주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그의 의도와는 달리 친일세력인 일진회와 통합되었고 이로 인해 동학 전체가 일진회와 동일시되면서 친일세력으로 매도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의암은 일진회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한편 이전의 동학과는 다르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것이 곧 천도교 개편의 직접적 이유가 된다. 동학과의 차별성은 문명개화의 노선으로, 일진회와의 차별성은 출교처분이라는 관계청산으로 매듭 지어졌다.
2) 시천주냐 인내천이냐
동학의 대표적인 사상이었던 시천주에서 인내천으로 바뀐 이유를 학자들은 대체로 교리의 합리화를 통해 신비적 요소를 제거하고 근대적 교단으로 탈바꿈하려는 의암과 교단 지도부의 해석으로 본다. 그러나 해월의 시대에 ‘인시천’이니, ‘심즉천’이니 하여 시천주의 신앙보다는 마음의 주체적 자각을 강조하는 교리로서 변화가 감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시대적 요구라 하기 보다는, 시천주 교리의 이론적, 내재적 성숙이 곧 인내천 사상이라고 해석 할 수도 있다. 시천주 교리 안에 이미 인내천이 자라날 씨앗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내천만 강조하다 보니, 천도교가 마치 한울님에 대한 신앙도 없고, 존재마저 부정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런 경향은 1920년대에 들어 더욱 심해졌고 수련조차 등한시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종교교단으로서의 면모를 퇴색시켰다. 이러한 원인은 과정을 생략한 채 결과만을 가지고 이념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며, 결국 인내천을 이념적으로만 강조하면서 죽은 신앙, 말라붙은 수행이 되어버렸다.
이돈화의 ‘인내천주의’는 과학과 일치 시키려고 했으며, ‘수운주의’를 통해 서양사상에 대한 대안이자 철학과도 배치되지 않는 신앙으로서의 완전한 진리를 내놓았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진리는 이론적 정합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있다. 몸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고 생활이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인내천의 교리화는 시천주의 체험이 생략됨으로서 신앙과 수행의 약화를 가져왔다.
3) 천도교의 민족운동
천도교는 ‘천도교청년당’ 활동을 중심으로 문화적 각성의 ‘문화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이러한 운동은 의암의 문명개화와 실력양성운동을 보다 강화하여 자치운동의 노선을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계몽운동은 정신적으로는 인내천을 최고의 이념으로 삼으면서도 물질문명에 대해서는 서양의 것을 맹목적으로 추구했다. 이 때문에 우리의 과거 전통을 부정하고 서구적인 것을 무조건 앞선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들의 신문명, 신세계에 대한 갈망은 전통과 과거, 조선의 현실을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렀고 농민과 대중은 해월이 주장한 ‘한울로 받들어 모셔야 할 존재’라기 보다는 계몽을 통해 깨어나야 할 몽매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수운과 해월의 동학적 실천은 비록 당장의 현실적인 방책으로는 무력해보이지만 인간의 삶이 경쟁과 대결의 소용돌이 속에서 본래성을 잃어갈 때 언제나 삶의 가장 근원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현실의 삶에서 무욕과 청정을, 마음에서는 평정과 온화함을, 그리고 모든 생령에게는 ‘모심’의 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새로운 천도교 지식인들의 운동 방향성은 시천주 체험을 통한 사회적 성화라기보다는 민족적 위기 상황에서 국권을 회복하고 문명개화를 통한 자강을 이루어내는 민족운동의 차원에 무개가 더 실렸다. 결국 동학의 개벽적 실천, 종교적 실천의 성격은 희미해졌지만 어쩌면 그들의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느끼며 치열하게 살 수 밖에 없었던 현실 앞에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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