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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서 토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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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생명의 서 토론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에 대한 토론지
발표자는 발표지에서 마지막 결론을 정리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운수 좋은 날」의 주제에 대한 의견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 작품이 쓰여진 시대 상황과 관련지어 ‘일제 강점하의 도시 빈민층의 비극적 삶’이라는 주제고, 둘째는 삶의 보편적 진실과 관련지은 ‘표면의 행운 뒤에 더 큰 불행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는 주제이다. 이 두 주제 중 어느 것이 더 작가의 의도를 잘 반영하고 있느냐 하면 첫째의 것이다. 앞서 본문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현진건은 동아 일보 재직시 일장기 말소 사건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서 일제의 언론 탄압에도 불구하고 항일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다. 또한 그의 다른 단편들인 「고향」, 「술 권하는 사회」 등에서도 그가 자신이 살아가는 조선 사회에 지식인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민족에 대한 연민, 독립에 대한 열망을 가졌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운수 좋은 날」이라는 소설을 쓸 때도 삶의 보편적 측면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가난한 하층민의 삶에 연민을 느끼고, 저들이 그토록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와 연결시켜 드러내고자 했을 것이다.
교육 현장에서 문학 수업은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사의 수업 방향도 중요하다. 「운수 좋은 날」의 주제에 있어서도 교사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수업의 내용이 달라진다. 물론, 학생들에게는 작품의 주제에 대한 두 가지 시각을 알려 주고 스스로 생각해 보게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교사가 학생의 입장이 되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아야 한다.
의 주제를 정리하면서 작가와 시대의 함수관계를 연결 짓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라면 유치환의 다음과 같은 삶의 모습은 그의 시와 서로 연결을 지을 때 어떻게 설명하고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생각을 묻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생명의 서(동아일보(1938.10.19) 수록), 일월(문장 3호, 1939.4), 바위(삼천리(1941.4)), 등에서 드러난 유치환의 어두운 시대 속에서 ‘삶에 대한 답 찾기’의 결과가 다음과 같은 기사로 이어진다면 어떻게 작가와 시대의 어긋난 관계를 학생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 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야기하고 있는 ‘교사가 학생의 입장이 되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아야 한다’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 통과 여부를 두고 정치권이 논란을 하고 있는 와중에 남쪽의 항구 도시 통영에서는 시인 청마 유치환의 친일 여부를 둘러싸고 논쟁이 뜨겁다. 유치환과 인연이 깊은 통영의 한 우체국을 청마우체국이라 이름 붙여 선양하려는 시도에 대해, 통영시의 일부 시민단체들이 친일 의혹이 있는 시인을 기리는 사업을 중지하라고 요구하자, 시인의 유족들이 이들을 명예 훼손으로 고발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협력과 저항의 일제 말 문학을 연구한 학자로서 필자는 일제 말기 유치환 문학의 진상을 밝힘으로써 이러한 소모적이고 감정적인 논란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유치환의 친일 문학에 대한 논란은 주로 〈수〉라는 작품에 한정되어 이루어지고 있다. 유치환을 친일이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 작품에 등장하는 ‘만주국’ 정부에 의해 목이 잘린 ‘비적’이 북만주 지역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사람이라고 하고, 유치환이 친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 ‘비적’은 단지 토비에 불과하기에 〈수〉에서 비적에 대한 비난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수〉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비적’이 항일운동가인지 토비인지는 불확실하다. 따라서 이 작품을 갖고 친일 여부를 가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렇다면 유치환의 친일 여부는 가리기 힘든 근거 없는 일인가 그렇지 않다. 유치환의 친일 여부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작품 〈수〉가 아니라 〈전야〉와 〈북두성〉이다. 〈전야〉는 학병의 지원을 촉구한 작품으로 유치환의 친일 행적을 가장 잘 보여준다. “화려한 새날의 향연이 예언”되는 역사의 전야에 조선 출신의 학병들이 정복과 승리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취지의 이 시는 당시 학병 특집으로 마련된 〈춘추〉 1943년 12월호에 발표되었다. 1943년 10월 20일 학도병 동원을 알리는 규정이 나오자 〈춘추〉는 11월호에는 학도병으로 참가하는 학생들 자신의 글을, 12월호에는 학도병 참여를 권유하는 글을 특집으로 마련했다. 바로 이 〈춘추〉 12월호에 유치환의 〈전야〉가 실린 것이다. 또한 일제 말 유치환과 함께 시작 활동을 했던 오장환이 해방 직후 〈민족주의라는 연막〉(〈문화일보〉 1947년 6월 4~6일)에서 청마를 두고 과거 학병 출정 장려시를 썼던 시인이 어떻게 민족주의를 운운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 하고 비판했던 것도 이 시를 가리킨 것이다. 1944년 4월 〈조광〉에 실은 시 〈북두성〉은 〈전야〉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아세아의 산맥 넘어서/ 동방의 새벽을 일으키다”로 끝나는 이 작품은 서구 근대를 극복한 대동아공영권의 수립을 축원하는 시이다.
유치환의 친일은 이런 문학 작품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행적에서도 이러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김소운이 일본어로 편역한 〈조선시집(중기)〉(1943년)에는 유치환이 현재 북만의 한 마을에서 농장을 경영하면서 하얼빈 협화회에 근무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김소운은 유치환의 첫 시집 〈청마시초〉가 발간되는 데 큰 힘을 보탰던 문우였고 하얼빈에서 직접 유치환을 만난 적도 있는 사이이기 때문에 그가 해놓은 약력 소개는 신뢰할 만하다. 유치환의 북만에서의 활동 중 농장 경영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가 하얼빈 협화회에서 근무하였다는 것은 그동안 알려져 있지 않았다. 물론 협화회에 근무하였다는 것 자체가 곧 바로 친일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만주국’의 협화회는 그 성격이 복합적이어서 일방적으로 친일단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야〉와 〈북두성〉을 고려하면 협화회에 근무했다는 것은 친일행적의 한 정황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유치환이 친일을 하지 않았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친일이 그의 문학 전반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