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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와 사림에 대한 역사적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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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훈구와 사림에 대한 역사적 인식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 당쟁론의 극복과 사화에 대한 재인식
조선 왕조에서 훈구 대대로 나라니 국왕을 위해 드러나게 새운 공로가 있는 집안이나 신하. 본문에서는 특히 세조 이후의 훈구파가 주요 대상이다 .
파와 사림파 조선 초기에 산림에 묻혀 유학연구에 힘쓴 문파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을 중심으로 성종 이후부터 정계에 진출하여 훈구파와 대립한다.
의 대립에 대한 인식은 16세기 이래로부터 이어져 왔다. 하지만 붕당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훈구와 사림은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하였다. 사림과 훈구의 대립, 즉 사화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 이다. 20세기의 사화에 대한 연구를 주도한 학자들은 주로 일본인 사학자들이다. 그 결과 사화와 붕당은 조선민족의 어쩔 수 없는 민족적 근성의 산물로 둔갑하게 되었고 이는 곧 조선을 식민지로 영속화시키기 위한 논리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일본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근본적인 반론을 제기한 것은 1970년 대 이태진을 비롯한 ‘붕당정치론’ 이 제기되면서 부터였다. 이후 붕당정치론에 대한 연구 작업은 일제가 남긴 당쟁론의 해악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이었고 붕당과 사화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끔 해주었다. 이 하에서는 특히 훈구와 사림의 대립인 사화에 주목하여 검토하여 봄으로서 그 실체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2. 사화연구의 두 가지 방향
1970년대 붕당정치론이 제기되면서 이태진은 조선의 정치형태의 변화고정을 붕당정치→탕평정치→세도정치 로 제시하면서 붕당정치를 ‘학문적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 ‘상호비판을 원리로 하는 정치’, ‘공도실현을 위한 정치’로 규정하였다. 이후에 역시 당쟁론을 극복하기 위해 활발한 학문적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화에 대한 관심이 제기되었고 사화를 붕당정치의 일부가 아닌 전혀 다른 정치구조에서 나온 현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그 근거를 제시하기 위하여 사화의 경제적 배경을 해명하는 일, 사화에 대한 정치적 이해를 확대시키는 일을 위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사림이 어떻게 정치적 주도권을 잡게 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3. 경제적 배경
일본 사학자들은 당쟁을 ‘ 극한적인 빈곤상황에서 나타난 사욕을 동인으로 하는 정쟁’ 이라고 보았다. 한편 이런 견해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 학계의 연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 16세기의 조선에서 강남농법의 전파에 따른 이앙법의 보급, 시비법의 보급 수리시설의 개량 등이 일어났고 16세기에 농업생산력이 확대되었음을 밝혀냈다. 그리고 관수관급제 성종 원년에 도입된 제도로서 관리들이 직전세를 지나치게 많이 거두는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관청에서 직전의 조를 받아 수조자에게 해당액을 지급하던 제도
의 실시에서 알 수 있듯이 수조권 개념 역시 보다 근대적인 의미로 발전하였음을 밝혀냈다. 또한 상업의 발달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고 결국 16세기는 결코 가난한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 번영 가운데서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 일어난 것임을 주장했다. 훈구파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권세를 이용하여 불법적으로 토지를 확보하였고 정상적인 부세체제 역시 그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방의 중소지주였던 사림들은 훈구파의 토지확대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었고 자신들의 재생산 기반인 향촌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훈구파의 비리에 대해 맞서야만 했던 것이다.
4. 정치적 이해의 확대
사림은 훈구파의 비리를 고발하고자 하는 자신들의 의지와 훈구파를 견제하고자 한 성종의 의지가 결합하여 정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들은 주로 삼사의 언관직을 차지하여 훈구파 대신들을 공격하였다. 물론 사림들은 몇몇 훈구 대신들을 공격하는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훈구파라는 정치권력 자체를 타도하고자 하였다. 사림들은 조선 개국 후 훈구파에 의해 만들어진 과도하게 중앙집권화 된 정치구조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왕을 비롯한 소수의 권력층에 의한 정치가 아닌 다수의 공론에 의한 여론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여론정치(공론정치)를 실현시키고자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삼사를 장악하고 이들의 언론활동체제를 보강강화해 나갔다. 하지만 훈구세력 역시 무력하게 자신들의 권력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그들은 국왕의 권력을 약화시키고자 한다는 명분과 사림들의 몇몇 언행을 문제삼아 무오사화 훈구파는 1498년에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의 내용이 단종을 폐위한 세조의 찬탈을 비난하고 공신들을 멸시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정치적 문제로 삼아 사림 대부분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된 사건
, 갑자사화 연산군 10년 1504년 임사홍의 밀고로 모친 죽음의 비밀을 알게 된 연산군이 관련된 모든 사람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낸 사건, 사림뿐만 아니라 다수의 훈구세력 역시 죽임을 당함
, 기묘사화 중종 14년 1519년에 남곤, 심정 등이 조광조의 위훈삭제사건에 앙심을 품고 走肖爲王사건을 꾸며 조광조 등의 사림파 다수를 죽이거나 귀양 보냄.
, 을사사화 명종 즉위 원원 1545년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의 훈구파 간의 대립에 사림들이 휩쓸려 화를 당하하게 된 사건.
등의 네 차례의 사화를 일으켜 사림들을 철저하게 탄압하였다. 그들이 이런 폭력적인 비상수단을 사용한 것을 미루어 보아 당시 훈구파에 대한 사림파의 도전이 얼마나 강력했던 것인가를 추론해 볼 수 있다. 사림파는 비록 네 차례의 사화에서 철저한 패배자였지만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훈구파에 비해 향촌이라는 재생산 기반을 가졌었고 이념상의 정당성을 가진 사림파는 서서히 정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네 차례의 사화를 통해 언관기구만으로는 훈구파를 견제하는데 한계를 느낀 사림들은 각 조와 행정부의 낭관직을 장악함으로서 당상관이 차지하고 있던 각 조의 장관과 행정부서의 장관, 즉 훈구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천체를 실시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시켜 나갔다. 결국 사림은 문정왕후의 죽음과 윤원형의 몰락을 기점으로 명종 말기에는 정계의 주류로서 위치하기에 이르렀다.
5. 사화와 붕당정치
이 상에서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과 그 배경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16세기의 경제적 발전과 그 성과를 독점하고자 했던 훈구파와 그에 반대하여 새로운 정치시스템을 만들고자 했던 사림파의 대립은 사화라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지속적인 재생산 기반과 이념적 우월성을 가진 사림들은 결국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기에 이른다. 결국 명종 이후에 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공론정치의 이상을 실현시키기에 이르렀다. 이황과 이이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후에 사림파는 각자의 학문적 전통성과 특정 공론에 때라 붕당을 만들게 되고 서로를 견제하면서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이 붕당정치의 질서가 무너지는 시점을 기점으로 하여 조선왕조가 급속히 무너지는 것은 조선에 있어서 붕당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좋은 근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