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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피아노 감상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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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영화 피아노 감상평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영화 감상평
19세기 말 미개척지 뉴질랜드.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해변가에 피아노 한 대와 두 모녀가 서있다. 20대의 미혼모 에이다(Ada: 홀리 헌터)는 자신의 아홉살난 사생아 딸 플로라(Flora: 안나 파킨)를 데리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이 낯선 땅에 도착한 것이다. 에이다는 여섯살때부터 침묵을 선택한 채 살아왔다. 그녀가 세상과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피아노와 그녀의 딸 플로라이다. 원주민과 함께 모녀를 데리러온 에이다의 남편 스튜어트(Stewart: 샘 닐)는 에이다의 생명만큼 소중한 피아노를 해변가에 버려두고 집으로 향한다. 버려진 피아노를 옮기기 위해 에이다는 문신을 한 얼굴에 글조차 읽을 줄 모르는 남편의 마오리족 친구 베인스(Baines: 하비 케이틀)의 도움을 받는다. 베인스는 에이다가 피아노를 치는 동안 자신이 원하는 어떤 행동이든 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면 피아노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이 협상은 이들을 점점 더 복잡한 감정과 성적 욕망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고 간다. 결국 에이다와 베인스는 원시의 땅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비밀스럽고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된 스튜어트는 질투와 분노에 휩싸여 에이다의 손가락을 잘라버린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뉴질랜드 출신의 여류감독 제인 캠피온의 대표작으로, 1993년 깐느에서 첸 카이거의 와 함께 그랑프리를 공동수상했으며, 1994년 아카데미에서 홀리 헌터가 여우주연상, 제인 캠피온이 각본상을 안나 파킨이 여우 조연상을 수상했다. 안나 파킨의 수상 기록은 아카데미에서 최연소 타이 기록이었다고 한다. 여주인공을 연기한 홀리 헌터는 극중 모든 피아노 곡을 직접 연주했다. 그만큼 그는 뛰어난 피아노 연주 실력을 갖고 있다. 19세기 중반 유럽에서의 감자로 인한 대기근(당시 아일랜드 인구의 절반정도가 숨졌다고 한다)과 미개척 신대륙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많은 젊은 남성들이 중남미와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로 향한다. 이 영화의 배경인 빅토리아 시대는 여성 성욕의 억압과 동의어인 시대이다. 또한 남성 지배적인 역사에서 여성의 경험은 거의 완전히 감추어져 왔고 여성들의 상상력을 해방시키고 현재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는 수단으로 ‘피아노’가 사용된 것 이다. 가 한 여성의 과거에 대한 단순한 여성 영화가 아닌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라고 볼 수 있다. 어느 정도 기반을 닦은 이들은 신부감을 구하기 위해 구대륙(유럽)에 광고를 내야만 했다. 영화 의 스튜어트도 이렇게 광고를 내어 에이다를 신부감으로 데려오게 된다. 에이다는 이 영화의 주인공으로, 6살 이후 스스로 말을 하지 않기로 하여서 자발적 선택에 의한 벙어리가 된 여자이다. 영화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이 에이다의 나레이션으로 처리되어 스스로 말문을 닫아버렸던 이유와 삶에 대한 그녀의 의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에이다가 가진 정신적, 육체적 장애, 이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에 대한 약자로서의 상태를 상징해주기도 하지만, 역으로 침묵을 구사함으로서 사회의 인습과 규제에 저항하는 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말을 하지 않는 행위, 이것은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거부하여 여성을 구속하는 가부장 사회에 강하게 반발하는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는 것 이다. 결혼을 하기 위해 섬에 도착한 에이다는 해변에서 부터 험난한 산길을 거쳐 집에까지 짐을 날라야 하는데, 그건 너무 힘들고 위험하므로 해변에 피아노를 그냥 두고 오게 된다. 그러나 어렸을 적부터 피아노를 쳐왔고 말을 하지 못하는 에이다에게 피아노는 딸 플로라를 제외한다면 유일한 소통의 수단이었다. 그래서 남편 스튜어트가 일을 나가 집을 비운 사이, 먼 길을 걸어가 피아노를 연주한 후 돌아오곤 했다. 이 영화에서 에이다와 플로라가 피아노에 어울려 있는 모습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피아노를 통해 흘러나오는 에이다의 독특하고 신비로운 감정에 베인스가 끌리게 되고, 베인스는 자신의 땅을 그녀의 남편에게 주고 피아노를 사서 그녀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에이다는 자신의 소중한 피아노를 되찾기 위해 사내가 자신의 몸을 한번 씩 만질 때마다 피아노의 건반 몇 개씩이 자신의 진짜 소유가 되는 거래를 응하게 되는데, 거래를 거듭하면서 어느덧 베인스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자칫 기묘하게 느껴지는 이러한 사랑의 획득 과정은 여성들을 겨냥한 남자의 설득이나 남자를 향한 여성의 정서란 논리적 통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육체적 접촉으로 완성된다. 이성간의 정서와 감정이 상대에게 온전히 전달되고 납득되는 과정이란, 복잡하고 기묘하며 또 어떻게 생각해보면 얼마나 어이없이 단순하고 명쾌한 것이다. 또한 아이러니한 것은 벙어리 에이다가 자신과 소통을 할 수 없는 문맹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의 전환을 맞이하게 되는데, 가부장적 사회의 윤리를 거부하며 육체적 사랑을 혐오하고 피아노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모든 것이었던 고결한 영혼은 결국 미묘한 심리적 갈등을 일으키며 잠재되어있던 성적 욕망이 촉발하게 되는 것이다. 에이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어 가자 베인스는 단호한 결정을 내린다. 피아노를 그녀에게 조건 없이 되돌려 주고 이제는 더 이상 그녀를 만나지 않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어느 사이엔가 베인스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베인스의 집으로 갈 명분이 없어져 버렸다. 마침내 사랑의 목마름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에이다는 피아노를 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베인스의 품에 안기기 위해서 그의 집으로 향한다. 에이다와 베이스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스튜어트는 베인스에 대한 접촉 금지를 엄격하게 명령하고 에이다를 감금하다 시피 집 안에 유폐해 놓는다. 참담한 절망에 빠진 에이다는 엎친데 덮친 격으로 베인스가 모든 것을 처분하고 영국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러자 그녀는 생명처럼 소중한 피아노 건반을 하나 떼내어 거기에 사랑의 글귀를 적은 다음 베인스에게 갖다 주도록 어린 딸에게 심부름을 시킨다. 그런데 철없는 딸은 그것을 베인스 대신 계부인 스튜어트에게 갖다 주고 맞다. 스튜어트는 배신감과 질투와 분노로 이성을 잃고 에이다의 방으로 한걸음에 내달려가서 들고있던 도끼로 그녀에게 피아노를 다시는 칠 수 없게 손가락을 잘라버린다. 하지만 결국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았던 그녀의 메시지를 강하게 들을 수 밖에 없었던 농장 주인 에이다의 남편은 그녀를 베인스에게 보낼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에이다를 베인스에게 보내준 스튜어트는 그렇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한 것 일 것이다. 이렇게 에이다와 베인스 둘은 도망쳐 배를 타고 떠나게 된다. 베인즈는 좁은 배에 피아노까지 싣고 가는 것은 위험하다는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에이다가 피아노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잘 알기에 피아노를 싣고 가는 것을 감행한다. 하지만 에이다는 떠나면서 자신의 감정의 분신인 피아노를 바다 속에 버려달라고 부탁한다. 한 남자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통로와 대상을 찾게 된 그녀에게 피아노는 이제 쓸모없어 진 것이다. 바다로 떨어지는 짐에 묶인 밧줄에 자신의 발을 휘어 감고 에이다는 차갑고 어두운 바다 속으로 빠져 든다. 이렇게 차갑고 어두운 바다 속으로 빠져들 때 에이다는 눈을 감고 그대로 빠져든다. 하지만 곧 눈을 뜬 에이다는 발목에 묶인 끈을 풀고 물 밖으로 헤엄쳐 나온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장면이 음울하면서도 바다 속의 파란 색채와 적절히 어우러진 환상적인 분위기로 연출된다. 이제 에이다는 한꺼풀 껍질을 벗고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섬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에이다는 베인스가 만들어 준 철로 된 인조 손가락으로 다시 피아노를 치게 된다. 또한 베인즈는 의사 소통을 위해 에이다에게 말을 가르친다. 그렇게 행복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영화는 남성들 간의 차이를 보여주고 어떤 것이 여성들의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지를 묻는다. 구획을 짓기에 익숙한 자본주의적 인물이자 도끼로 상징되는 스튜어트라는 남편을 버리고 원주민과 친한 베인스를 아이다가 선택하는 것은 두고두고 논쟁거리가 될 만하다. 피아노가 상징하고 있는 것은 바로 여성의 감성 그 자체인 것 이다. 그녀는 자신만의 특유의 복잡한 감정을 피아노를 통해서 풀어낸다. 벙어리로서 주위 사람들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그녀에게는 피아노 이외에 그녀 특유의 복잡하고 섬세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그 어떤 도구도 없으며, 피아노 이외에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아무런 대상도 없다. 때문에 그녀에게 있어서 피아노는 자신의 존재 그 자체만큼 소중한 것이다. 만약 인간에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대상도 없다면 그 인간은 과연 계속 존재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전의 그녀가 가졌던 세상의 모든 것이었던 피아노. 그러나 그녀는 그녀에게 있어 피아노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이해해주는 남자의 손을 잡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바다 속으로 빠져들었을 때 피아노 연주자 에이다는 죽었고, 한 남자를 사랑하는 여인 에이다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여성 감독 제인 캠피온이 만든 피아노는 서구 오락영화에서는 거의 드물게 완벽할 정도로 여성 중심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피아노는 벙어리 여주인공을 통해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묘사하고 있다. 영화를 얼핏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고 여주인공 에이다의 내면 세계는 파악하기가 난해하다. 하지만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은 그녀 내부의 광기에 가까운 열정적인 자세이다. 하지만 카메라의 시선이 시종일관 주인공 에이다의 삶을 추적하는 점에서 누가 보든 간에 여성 문제를 주체적으로 취급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또한 강한 시적 언어로 여성의 시각을 섬세하게 드러내며, 인간의 내면적 성찰을 진지하게 파헤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라고 하기 보다는 한 편의 시라고 할 정도로 서정적인 면을 강조한 영화인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에이다가 피아노와 함께 바다에 빠진 것이 자살 의도였는지 아니면 우영한 실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더욱이 자살이든 실수이든 피아노에 묶인 밧줄을 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