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 머신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

 1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1
 2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2
 3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3
 4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4
 5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5
 6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6
 7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7
 8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8
 9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9
 10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10
 11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11
 12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12
 13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13
 14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14
 15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15
 16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16
 17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17
 18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18
 19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19
 20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20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송강 정철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에 대하여 -
Ⅰ. 들어가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유학을 국시(國是)하여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켰으나, 16세기에는 사화(士禍)와 당쟁으로 인해 정국은 안정을 잃었다. 이런 와중에서 송강 정철은 사림파가 집권세력으로 등장해 동인과 서인이 분열된 시기에 서인의 영수(領袖)로서 재상의 지위에까지 오른 사람으로, 정치적인 활동에는 시비가 있었으나 가사, 시조, 한시 등에서 뛰어난 서정성을 발휘한 작가이다.
송강은 성리학에 대한 학문적 업적은 거의 남기지 않고 문학 작가로서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그는 성리학자들이 재도적(載道的) 문학론 재도적 문학론이란, 중국 송대의 전형적 도학가이자 송학의 시조인 주돈신(周敦, 1017 ~ 1073년)으로부터 전개되어 정이천 주자를 거쳐 확립된 주자학적 도덕주의 문학론이다. 이는 효용론적 관점에서 문(文)을 정치
외교 및 교화의 수단으로 보고, 문(文)을 통하여 경국제세(經國濟世)를 실현하고자 하는 현실참여의 의지를 반영해주는 실용적 문학론으로서, 조선조에서 주자학을 정치철학으로 받아들이면서 ‘수신’하여 ‘치국평천하’하고자 하는 현실에의 참여에 크게 관심을 기울였던 양반 관료계층 사이에 확고히 자리잡아온 문학론이다.
을 내세우면서 온유돈후(溫柔敦厚) 한시에서 풍기는 독실한 정취 즉 기교를 부리거나 노골적인 표현이 없는 것
하고 충섬소산(沖簫散)한 작품의 창작에 힘쓸 때, 송강은 문학론이라 할 만한 글을 남기지도 않았고 재도적 문학론에 구애받지도 않은 다양한 작품을 창작하였다. 특히 그의 가사 작품은 당대 비평가들로부터 최고의 국문시가로 평가받았다.「구운몽」의 작가 서포(西浦) 김만중은 송강의 가사에 대해 ‘우리나라의 참문장(左東眞文章)’, ‘우리나라의 이소 초(楚)나라 屈原(굴원)이 지은 부(賦)의 이름. 굴원이 반대파(反對派)의 참소(讒訴ㆍ訴)에 의(依)해 조정(朝廷)에서 쫓겨나 임금을 만날 기회(機會)를 잃은 시름을 읊은 서정적(敍情的) 대서사시(大敍事詩)
(我東之離騷)’라고 평했으며, 홍만종은 ‘「관동별곡」은 사물 표현의 묘함과 조어(造語)의 신기함의 악보(樂譜)의 절조(絶調)라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또한 송강의 가사를 한역(漢譯)한 바 있는 김춘택은 ‘송강의 가사는 일월(日月)과 그 빛을 다툴 만하다’고 극찬하였다.
본고에서는 송강 정철의 삶과 문학의 관계를 불가분의 관계로 보고 그의 삶의 발자취를 알아본 다음 그의 삶의 흔적과 시조 81수, 가사 4편, 한시 758편 등의 작품 속에서 드러난 삶과 정서적 표현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Ⅱ. 송강의 정치적 삶
여러 차례 유배와 일시적인 귀향이 있었지만 송강은 27세부터 58세까지 약 30년 간을 관료로서 봉직하였다. 그러나 그의 오랜 관료 생활은 매우 기복이 심한 데다가 적지 않은 시련을 포함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당대의 정치적 상황에 있으나 송강 자신의 성격이나 행동방식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26세 때인 명종 16년(1561)에 진사시에 1등으로 급제하였고, 이듬해 문과에 장원을 하여 사헌부 지평(持平)에 제수받으면서 처음 관계(官界)에 입문하였다. 청년 관료 시절에는 매우 강직한 성품과 투철한 사대부적 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자세는 곧 정치적 시련으로 되돌아왔다. 명종의 종형(從兄) 경양군이 그의 처가의 재산을 빼앗고자 처남을 유살(誘殺)한 일이 발각되어 사형에 처해지게 될 옥사가 일어났다. 명종은 송강에게 관용하여 달라는 부탁을 직접했을 정도로 이 사건이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희망하였으나, 송강은 의법(依法) 처리를 고집하여 경양군 부자를 사형에 처한다. 이러한 사건의 처리에서 명종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여러 해 동안 한직을 전전하다가 31세에 북관어사(北關御使)를 한달 여간 맡은 것을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