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 머신

현대시론 김기택 바늘구멍 속의 폭풍 을 읽고

 1  현대시론 김기택 바늘구멍 속의 폭풍 을 읽고-1
 2  현대시론 김기택 바늘구멍 속의 폭풍 을 읽고-2
 3  현대시론 김기택 바늘구멍 속의 폭풍 을 읽고-3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현대시론 김기택 바늘구멍 속의 폭풍 을 읽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김기택 『바늘구멍 속의 폭풍』을 읽고
김기택의 『바늘구멍 속의 폭풍』을 읽으면서 느꼈던 시집의 전반적인 느낌은, 주로 생활 주변의 소재들을 이용해 높은 수준의 관찰력을 통해 재해석해낸다는 점이었다. 이를 통해 시 한 편을 읽을 때 시에 푹 빠져들게 하는 묘미가 있었다. 시집의 처음 시인 「밥 생각」만 해도 퇴근길에는 간절하게 밀려오던 밥 생각이 배가 든든해진 후에는 아주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재미있게 풀어내었다. 특히, 밥 생각이 사라지는 과정(‘마음가득 밥 생각’, ‘배불러지는 밥 생각’ → ‘오만가지 잡생각’, ‘사라져버릴 밥 생각’)을 각운으로 표현한 것이 재미있는 점이었다. 「새」나 「너무 잘 크는 화초 하나」와 같은 시들도 날아다니려는 새의 본능과 뿌리를 뻗으려는 화초의 본능을 억제하는 현실을 잘 그려내었다. 「너무 잘 크는 화초 하나」에서 ‘그래도 뿌리가 커져 화분이 터지는 일은 없으리라’라는 표현이 무척 와 닿았다. 또 이 시집에는 죽음이나 병과 관련된 소재도 눈에 많이 보였다. 「파리」, 「천년 동안의 죽음」, 「바늘구멍 속의 폭풍」, 「귀」 등의 시가 그 예이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했던 「바늘구멍 속의 폭풍」은 무척 몰입해서 읽었던 시 중 하나인데, 이는 시의 주인공이 병에 시달리는 모습을 몹시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를 잘 해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천년 동안의 죽음」에서는 미라의 모습을 묘사해냈다. 죽어서 자연 속으로 돌아갔으나, 아직 형체는 남아 천년이 되도록 완전히 자연이 되지 못한 미라를 보면서, 이제는 역사 속에 잠 들었으나,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은 여러 문화재들이 떠올랐다. 이제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뼈대만 남아있는 옛 궁궐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신체가 온전히 보전되어 있는 미라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많은 시들 중 시를 읽고 많은 생각을 했던 시는 「귀」였다. 시인의 세심한 관찰력과 사고가 돋보이는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귀… 귀… 귀… 귀…’로 시작하는 이 시는 처음 읽을 때에는 여느 시처럼 3인칭 시점의 화자가 서술하는 시처럼 보였다. 시를 읽어나가다가 이 시의 화자를 알아챈 순간 머리가 띵했다. 이 시의 화자는 안락사 당할 자신이었다. (시에서) 제일 충격적이었던 것은 식물인간도 귀가 있으며 들을 수 있으며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식물인간이라는 이름은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의 특성을 가져다 지은 이름일 것이다. 식물은 말하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니, 식물인간 또한 그러할 것이라 자연스럽게 믿은 듯하다. 때문에 ‘귀’를 통해 주변의 소리를 듣고 죽기까지 생각하는 과정이 낯설게 여겨졌던 듯하다. 시에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리라/ 내가 식물 인간 속에 숨어서/ 이 모든 이야기를 낱낱이 엿듣고 있다는 것을’이라는 구절처럼 나 또한 식물인간이 그럴 수 있다고 차마 생각하지 못 했다.
사회에서 끊임없이 안락사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지만, 그것은 언제나 산 사람의 입장에서 갑론을박했던 것 같다. ‘산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분명, 죽을 사람 때문에 평범했던 가정들이 막대한 빚더미에 오르는 현상 또한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식물인간이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죽기 전에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고민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다. 그들이 죽기 싫어한다면 그들을 살리고, 그들이 죽고 싶어 한다면 안락사하는 것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방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시를 읽으면서 들었다. 난 죽게 생겼는데 자기들은 살아갈 걱정을 하는 게 분할까? 가족들에게 짐이 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할까? 나라면 내 죽음에 슬퍼할 가족들 생각에 마음이 울컥할 것도 같다. 그런데 의외였다. 죽음 앞에서 해탈이라도 한 걸까? 다른 사람들의 소음은 그렇다 치고 ‘아들 살려내라’는 어머니의 절규조차 다정하고 친근하며 평화롭게 들린다고 한다. 그리고 죽는다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어느 순간 죽어간다. 이제 곧 죽는다는데 두려움, 아쉬움, 남기고 가는 가족들에 대한 애잔한 마음 등등이 하나도 안 느껴질 수가 있는 걸까? 잘 모르겠다. 그건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죽음이 임박한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느낄 수가 없고, 죽음에 임박한 사람이 그 느낌을 메모해 두고서 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절대 상상해낼 수 없는 영역에 대한 상상, 이 시는 그것을 독자들에게 선물해주는 듯하다.
개인적으로 김기택 시인의 시들은 매우 좋았다. 황지우 시인의 의 시들은 독특한 형식과 많은 한자들 또 그 시대만의 언어로 지은, 즉 배경지식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시였던 반면 이 김기택 시인의 시들은 자연스레 읽혀졌다. 단순히 이해하기 쉽고 읽혀지기 쉬워서 이 시들이 좋은 것은 아니다. 김기택 시인의 시들은 소재는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이나 그 속에 그만의 놀라운 상상력을 엿볼 수 있다. 제목들도 단순하다. 틈, 주름살, 멸치, 무좀 등 대부분 단어들만으로 된 것들이 많은데 김기택 시인은 그 단순한 단어를 아주 재미있게 풀어 나간다. 그중 ‘무좀’ 이란 시는 무좀의 ‘가려움’의 특성에 대해 매우 리얼하고도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무좀의 가려움을 느껴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려움의 충동에 대해 충분히 공감 할 수 있었다. 또 ‘선거유세’라는 시는 선거유세 장면을 세세하고 또 재미있게 그려낸다. 선거 유세자들이 외치는 ‘양심’이 ‘야! 심!’으로 발음되어 나온다고 하거나 ‘뻥! 뻥! 몇 배로 튀겨진 말‘이라고 하는 등 유세자들의 풍자와 함께 웃음을 자아 낸다. 이러한 일상적인 시들이 나는 좋다. 평범하면서도 독창적이다. 시를 보고 겁이 먼저 났던 황지우 시인의 시들과는 달리 이 시집의 시들은 편안하면서 마음속에 와닿는 시들이 많았다. 그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시는 ‘먹자골목을 지나며’이다. 처음 제목만 봤을 땐 맛있는 음식점들이 줄서서 있는 골목인 ‘먹자골목’의 특성상 그 생동감, 활발함의 묘사의 시이거나 먹자골목에서의 추억회상 등의 시로 추측했었다. 그러나 이 시는 ‘죽음’과 ‘삶’에 대해 논한다. 환상적인 돼지갈비의 향과 맛은 배고픈 우리를 활기 넘치게 만든다. 흥분하게 만든다. 하지만 시인은 우리의 혀와 위장은 죽음을 씹고 있다고 말한다. 다른 이의 살을 태우면서 우리는 살을 찌우고 있다. 한 생명의 죽음을 우리는 즐기고 있는 것이다. 갈비로 만들기 위해 돼지를 죽이고 내장을 제거하고 살을 발라내는 모습들을 생생히 보고서도 과연 이 갈비를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과정을 보지 않았기에 우리는 결과물인 갈비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피 냄새만을 제거 한다고서 그 음식이 피를 가졌던 생명체임이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김기택 시인은 우리가 이 비리고 고약한 냄새를 혀와 위장이 잠시 속고 있다고 한다. 그 죽음과 공포를 모른 채 그 맛은 오히려 천연스럽고 뻔뻔하기까지 하다고 한다. 그 공포는 환각으로 가려져 있다. 우리는 그 환각의 맛과 냄새에서 벗어 날 수 없다고 말한다. 살아있는 다른 생명의 ‘죽음’을 취함으로 ‘생동감’을 얻는 무자비한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단순히 음식만이 아니다. 우리는 환각 속에서 살아간다. 단순한 욕망으로, 우리는 본능에 충실하고 소비사회에 길들어져 간다. 시인은 이렇게 먹자골목을 논하다가 갑자기 /수많은 죽음을 품어 아름다워지고 풍요해진 산처럼/ 이라며 ‘산’에 비유를 둔다. 산이 왜 수많은 죽음을 품었다고 말하였을까. 산은 많은 동식물들이 태어나고 죽는 장소이다. 또한 ‘무덤’도 많다. 죽은 이들의 무덤을 품었지만 산은 여전히 풍요롭고 아름답다. 진짜 삶과 죽음이 섞여져 있는 것이다. /한몸 속에 삶과 죽음을 섞어놓으려고/서로 한곳에서 살며 화해하게 하려고/ 혀와 위장을 맛의 환각에 흘리게 한 건 아닐까/ 삶과 죽음을 품고 있는 산처럼 우리는 죽음(고기)을 몸 속에 넣고 섞는다. 죽음과 삶이 합쳐져 있는 것이다. 살아가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는 행위는 잔인하다. 하지만 이 또한 자연이라고 말 하고 싶었던 것 일까. 이 시는 다른 생명의 죽음을 죄의식도 없이 섭취하는 인간들에 대해 또 그 자연의 섭리와 본능에 대해 한번쯤은 더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