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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그와의 생각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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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리스토텔레스, 그와의 생각 나눔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아리스토텔레스,
그와의 생각 나눔
☆들어가는 말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 역시 매일 행복하길 바라고 행복을 꿈꾼다. 우리나라의 현행 헌법 제 10조에서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법적으로도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행복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 논의는 어느 곳에서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현대 사회에서 행복을 규정짓고 있는 것은 단연 돈이라고 할 수 있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다. 우선, 돈 물질적인 요소가 충분할 때 사회 생활을 영위하는데 불편함은 없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먹고 자고 입는 것 등의 의식주 생활은 보통 돈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는 과학 기술이 급격하게 발달함에 따라 이에 따른 핸드폰, 노트북, PMP, 디지털 카메라 등 많은 물품들이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러한 물품들을 구입할 수 있는 수단 역시 돈이다. 흔히 하는 말로, 돈으로 사람을 살리고 죽일 수도 있다.라는 말이 있다. 보험금을 타기 위해 자신의 부모님을 살해한 경우, 가장임에 불구하고 집안을 유지할 수 있는 돈이 없어 가족 모두가 투신 자살을 한 경우도 모두 이와 같은 사례이다. 얼마 전에 큰 이슈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연기자 안재환의 자살 역시 돈과 관련해서 일어난 사건이다. 이와 같이 현대 사회에서 돈은 생명을 다루는 신의 범위까지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이러한 돈과 행복은 과연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을까? 앞에 내용을 살펴보면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명제가 나오고 이에 따라 돈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 추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의 실례를 들어 보면 내가 정말 사고 싶은 가방이 있었는데 우연히 돈이 생겨 그 가방을 살 수 있어서 굉장히 행복했던 적이 있었다. 이와 같이 돈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부분적인 이야기이다. 현대 아산의 회장이었던 고 정몽헌 씨 역시 물질적 풍요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재벌이었다. 물론 그가 자살한 이유에는 복합적이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를 통해 돈이 행복을 만든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과거에 한 조사기관에서는 각 나라의 행복지수를 측정했는데 모두들 예견하기로 미국과 같이 부유한 강대국이 행복 지수가 가장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98년도 조사에서는 방글라데시가 가장 높았고 최근 조사에서는 덴마크가 가장 높았으며 미국과 같은 선진국은 중위권을 맴돌았다고 한다.
물질만능주의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지 몇 십 년 째, 우리는 이러한 풍토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의 삶을 반성해보아야 한다.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해 고민하던 중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행복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아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번 도덕과제의 제재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제목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 그와의 생각 나눔으로 정해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로, 알렉산더의 스승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기원전 384년 그리스 북부 지방의 작은 도시 스타게이라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세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옮겨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영향으로 자연은 어떤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물의 본질이 구체적인 사물과는 별도로 존재한다는 스승의 이데아론을 거부하면서 입장의 차이를 보였다. 즉 책상의 본질과 책상이라는 구체적 물질은 분리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또한 윤리학에서도 플라톤은 물리적이며 개별적인 사물의 형상과 구조가 사물의 본질의 개념이라고 본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좀 더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지식을 중요시하였다. 이와 같이 플라톤은 이상주의였고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주장과는 다른 자신만의 사상을 가지고 발전시켜 나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으로서의 행복을 완전한 덕에 따르는 마음의 활동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덕을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으로 구분한다. 도덕적인 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기며, 지적인 덕은 교육에 의해 발생하거나 성장한다. 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주로 도덕적인 덕, 일상적인 도덕에 대해 논하였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인간은 궁극 목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이 궁극목적은 최고선, 즉 행복이라고 말했다. 최고선으로서의 행복이란 우리 인간만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본성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으로 가능한 가장 완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쾌락이나 소유하거나 쟁취하는 것이 아닌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는 수많은 잠재성을 완전히 실현하는 것이 최고선, 행복 그리고 도덕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과 정신적 능력을 강조한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자아실현의 윤리학이라고도 불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옳고 그른 행동과 선택이 정념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정념이란 "욕망, 분노, 공포, 태연, 질투, 환희, 사랑, 증오, 동경, 경쟁심, 연민, 그리고 쾌락과 고통을 수반하는 감정들"이다. 욕망이나 쾌락이 지나칠 경우에는 탐닉이 되는데 이는 분명 악덕이 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정념들과 어떻게 관계 맺느냐에 따라 행동과 선택이 악덕해질 수도 유덕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념을 무조건 억압하고 억누를 것이 아니며 이 정념은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라고 주장했다. 정념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니다. 이에 따라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덕의 문제는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만 순화된 욕구, 이성화된 욕구, 즉 자연적 정념이라는 질료에 훌륭한 형상을 부여하는데 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앎이 바로 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위를 실천하고자 하는 선의지가 있어야 덕이 된다는 주장을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살인, 절도 등은 악한 행동인 것을 알지만 선한행동을 실천하려는 선의지가 부족하기에 이러한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덕을 실천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도덕의 핵심으로 한다. 중용이란 이성을 이용하여 감정을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조화롭게 발휘하는 덕을 의미한다. 정념이 과도하거나 부족하지 않은 중간을 의미하며 이는 산술적인 평균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용의 원리에 따라 정념을 표현하는 일은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하여, 마땅한 사람들에 대하여, 마땅한 동기로 그리고 마땅한 태도로 정념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용기, 절약 등이 중용의 예로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과 중용에 대한 위와 같은 일반적인 언급을 개별적인 사실과 실제에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행위란 어디까지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경우에 관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념, 욕구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선, 중용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중용의 구체적인 덕목이 있지만 이것들은 정해진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들 개개인마다 정도와 상태가 상대적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먼저 명예와 불명예 사이에 중용은 긍지이며 무모함과 비굴함의 사이에는 용기라는 중용이 있으며 성급함과 무기력 사이에는 온화라는 중용의 덕이 있다. 그리고 허풍과 거짓 겸손 사이에 중용은 진실이라는 덕이다. 마지막으로 생산과 소비활동에 있어서 낭비와 인색함 사이에는 절제가 있다. 이 모두는 정제된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하여, 마땅한 사람들에 대하여, 마땅한 동기로 그리고 마땅한 태도로 상황에 맞게 조절되고 선택된 행동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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