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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어학 장개석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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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장개석의 사상
훈정지배
중국동맹회 시대의 ‘3서’는 ‘군법의 치, 약법의 치, 헌법의 치’인 것을 에서는 “본당 진행의 질서는 세 시기로 나눈다”라고 하여, 그 삼단계를 군정- 훈정 - 헌정으로 개칭하고, 혁명달성을 위한 과도기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군정과 훈정의 두 시기는 혁명당에 의한 일당독재시기이다. 혁명당이 국민정부를 조직하고, 국민정부를 운영하여 군정시기와 훈정시기를 통괄한다. 군정은 군정부의 건설이며, 군사독재권이 중앙과 지방을 통괄하는 것으로, 의회정치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군사적 통일이 완성되고, 반혁명의 위험이 없어지면, 군정을 끝내고 훈정으로 이행한다. 훈정시기는 현 단위와 성 단위에 지방의회를 탄생시킨다. 각지의 현 의회가 민주적으로 기능하기 시작하면, 상위의 성의회를 정비한다. 이렇게 해서 지방수준에서 인민의 정치의식을 훈도해 가는 것이 훈정적 민주화의 핵심이다. 중앙정부는 여전히 의회가 존재하지 않는 혁명당 독재체제의 계속이다. 훈정적 민주화에 성공하여 전국적으로 지방자치가 확립된다면 전국적인 국민대화를 개최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하고 이상으로 여기는 헌정에 돌입하는 것이다.
장개석의 국민당은 손문의 유훈을 충실히 지키는 정치를 선택하였다. 1928년 6월 15일, 전국통일의 대외선언을 발표하고 군정시기의 종식을 선언했다. 그리고 8월 국민당 제2기 5중전회에서 훈정단계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0월 3일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은 6항목으로 구성된 짧은 조문이다. 훈정시기에는 중국국민당 전국 대표대회가 국민대회를 대행해서 국민을 통치하고, 국가권력의 정권을 행사한다는 점과, 치권으로서의 행정입법사법고시감찰의 5항목은 국민정부에 위임한다는 것이 주요내용이다. 즉 국민의 정치적 권리인 참정권을 국민당이 맞고, 국민당이 국민의 정치적 권리를 대행한다는 논리이다. 때문에 국민선거를 통한 국회가 아니라 국민당 전국 대표대회가 국 회의 기능을 대행하는 것이다. 요코야마 히로야키 ,《중화민국사》 p160
6조를 통과시키고 국민정부가 반포 시행하게 되었다. 이 훈정강령은 국민당 훈정지배의 국가적 기본법이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국회 등의 입법기관에 의해 제정된 법률에 의해 지배의 합법성을 확립한 것이 아니라, 혁명(북벌전쟁)에 의해 수립된 혁명정당의 정치적 군사적 지배력에 의해 지배의 정통성을 선언했던 것이다. 국민당의 결정에 지나지 않는 절차에서 국민 전체가 구속되는 기본 방침이 탄생하였다.
훈정지배는 유능한 현인(국민당)이 무능한 우민(국민)의 정치적 권리를 도맡아 대행한다는 전형적인 대행주의이다. 북벌전쟁의 승리라는 혁명군사력으로 지배를 확립한 현실을 정당화하려는 논리이며 손문의 권위를 이용하려한 것이다. 손문은, 훌륭한 正人君子이며, 그러한 善政的 영수의 노선을 답습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중국의 전통적 통치관 정치도덕에 따라 지배의 정통성을 확립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국민당은 아직 전국정당으로서의 국민적 지지와 조직화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선거로 정권을 다투게 되는 헌정을 실현하기 전에 여타의 당을 상회하는 부동의 지위를 확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장개석도 손문과 같이 인민을 아두(무능자)로 간주하고 그들의 주체적 정치판단을 신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훈정지배는 소련공산당 일당독재체제의 정치적 효율을 학습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현인지배의 선정주의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국민당의 전국통일은 비원의 달성이었지만 동시에 위기도 내포하고 있었다. 최대의 위기는 군사적 불통일이었고, 다음은 정치적 불통일이었다. 군사적 불통일은 지방 군벌의 이합집산으로 성립된 국민혁명군의 성격에서 유래한다. 장개석은 근대적 통일군을 조직할 필요가 있었다. 군벌을 해체하고 장개석의 지휘하에 재편성하기 위해 編遣會議를 개최하고 통일지령이 가능한 통일군의 창설을 시도했다. 이로 인해 군벌의 개인적 군대를 해체하고 정치력을 빼앗는 결과를 초래했고 저항도 컸다. 그 저항을 배제하고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서 훈정적 집권체제의 확립이 바람직했다. 남경정부에 무한정부가 합류하여 성립한 신정권이었기에 권력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분산경향을 내표한 위기구조 속에서, 정권정당으로서의 절대적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내부통일로서의 훈정지배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요코야마 히로야키 ,《중화민국사》 pp. 162 ~ 3
안내양외
‘안내양외’책은 외국의 침략이라는 국난에 맞선 전략이다. 안내양외는 원래 남송시대 국내적으로는 농민봉기, 대외적으로는 금의 침략이라는 내우외환에 직면했을 때 주희가 상주한 전략이라 일컬어 진다. 먼저 농민봉기를 진압하여 국력을 통일하고(安內), 통일된 국력을 강화한 뒤에 금의 침략을 배제한다는(攘外) 전략이다. 내우를 우선 해결하고 그 뒤에 외환을 해결하는 것이기에 ‘先安內後攘外’이다. 요코야마 히로야키 ,《중화민국사》 pp.198~199
중국 공산당은 안내양외책을 일본군에 저항하지 않고 공산당 토벌에 모든 정력을 쏟은 반동국책이라고 비판하지만 그리 단순한 것만은 아니다. 장개석은 중국의 국력이 준비되지 않는 한 적극저항주의는 허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장개석이 ’안내양외‘책을 최초로 제시한 것은 1931년 7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