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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철학사 생각하는 갈대 블레즈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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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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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근세철학사] 생각하는 갈대, 블레즈 파스칼
생각하는 갈대, 블레즈 파스칼
- 목 차 -
1. 파스칼의 생애
2. 인식론의 특징: 자연과학과 이성, 전통과 권위, 습관의 의미
3. 인간의 존재 상황: 불안과 비참 그리고 위대함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 신의 의미
4. 도덕과 행복 : 보편적 도덕과 영원한 행복의 가능성.
5. 파스칼 비판
1. 파스칼의 생애와 저작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1623년 6월 19일 프랑스의 클레르몽(Clermont)에서 세무법원 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불행하게도 그가 3살이 지났을 무렵,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그러한 이유로 그의 아버지는 더욱 가족을 소중하게 대하기로 여기고 스스로 파스칼의 교사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파스칼은 학교라고는 어디에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하지만 파스칼은 어떤 현상에 관심을 가지면 이유를 물었고, 그 이유에 오류가 있다면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한 성격과 파스칼 고유의 천재성이 더해져 그는 12살에 스스로 유클리드 기하학 32번 명제를 증명하여 아버지를 놀라게 하였고, 이로 인해 1635년 이후 아버지와 함께 수학연구를 시작했다. 이에 메르센을 중심으로 한 학자들의 모임에 가담한다.
16세 때는 데자르그의 사영기하학의 입장에서 쓴 ‘원뿔곡선 시론’으로 세상을 놀라게 함으로써 아르키메데스 이래 가장 뛰어나다는 말을 들었다. 파스칼은 19세가 되자 징세관인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획기적인 ‘자동계산기’를 고안, 제작하기도 한다. 23세 때에는, ‘토리첼리의 진공실험’을 직접 시험해 보고, 진공이 생기는 원인을 대기의 압력으로 정리한다. 그러고는 다시 생각을 넓혀서 유체 탄력학 전체에 미치는 ‘수압기의 원리’를 발견하여 그때까지의 잘못된 학설을 타파했다. 이 같은 과학상의 업적은 파스칼의 일상생활과 결부되어 있었다. ‘자동계산기’의 발명도 아버지를 돕기 위해서였고, 나중에 확률론을 창시한 것도 도박을 좋아하는 한 친구한테서 판돈 분배법에 대한 질문을 받은 데에 기이한 것이었다. 1658년에 사이클로이드의 문제를 해결하여 적분법의 중요한 공식을 발견한 것도, 밤새도록 그를 괴롭힌 치통을 잊기 위해 몰두할 대상을 찾았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1646년은 파스칼이 수학자로서 명성의 토대를 마련한 시간이었지만, 파스칼의 회심의 시기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다리를 다쳐 집에서 요양해야만 했다. 파스칼은 루앙 근교에서 두 사제에게 보살핌을 받았는데, 이 때 파스칼 가족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토대로 하여 17~18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 된 종교운동이다. 얀센주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거부하고 신의 예정설을 채택 했으며 구원의 열쇠는 인간의 선행이 아니라 신의 은총이라고 가르쳤다. 포르-루아얄 수도원은 얀센주의 종교운동의 중심지였다.
얀센주의 종교운동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 무렵, 파스칼은 심각한 중병에 걸리게 되는데, 1652~1654년에 파스칼은 의사에 권고에 따라 모든 종류의 정신집중을 피해야 하고 기분전환 시킬 기회를 찾기 위해 사교계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 사교계에서의 경험은 그에게 ‘기하학적 정신’에 대비되는 ‘섬세한 정신’을 깨닫게 해 주었다. 1653년에는 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그 당시에도 과학활동을 꾸준히 진행하여 이때에 『산술삼각론』(Abhandlung uber dasaritbmetische Dreieck)이라는 저서를 썼고, 확률론(Wahrscheinlichkeitsrechnung, 우연의 기하학(geometrie du hasard))의 사상을 구상한다.. 그리고 1654년, 사교계에 염증을 느끼고 다시 신앙으로 돌아선 그는 11월 23일 밤에 파스칼은 종교적 경험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날 깊은 감동을 받았고, 그의 삶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파스칼은 이에 대한 경험을 기록한 이른바 「메모리알」(Memorial)을 죽을 때까지 옷 안주머니에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1656년 소르본의 신학자들이 얀센주의의 주도적인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앙투안 아르노의 입장을 단죄하자, 파스칼은 그의 변호를 맡는다. 그는『프로뱅시알』(Lettres Provinciales)을 집필하는데, 여기서 예수회를 논박하였고, 그들의 결의론을 비방하였으며, 얀센주의 이론에 반대하는 그들의 증명을 모조리 반박하였다. 이 책의 중요성은 저자가 소르본의 신학자들에게 쏟아부은 전례 없는 조소 때문일 뿐만 아니라 비범한 그의 문장 때문인데, 근대 프랑스어 문체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한다.
이 시기에 파스칼은 은총에 관한 신학적 고찰을 기술하고, ‘크리스토 호교론’(Apologie des Christentums)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기획한다. 이 책은 파스칼 사후, 1670년에 『팡세』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파스칼의 아버지는 독실한 신앙심을 가지고, 종교에 대해 매우 큰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신앙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은 이성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원리로서 그에게 가르쳐 주면서,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종교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주었다. 어릴 때부터 반복적으로 들려준 이 원리는 그의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강력한 신앙심을 가지는데 기반이 되었다. 수학자, 과학자 다방면에서 위대한 이 천재는 모든 것을 깊게 탐구하는 동시에 종교의 모든 일에는 어린아이처럼 순종했다.
안타깝게도 파스칼은 위의 악성 종양이 뇌로 전이되어 격렬한 고통 속에 39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파스칼의 주요업적으로는 신학적 고찰과 사영기하학의 중요한 정리를 발견하였고, 페르마와 함께 확률 이론의 기초를 세운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