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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과학 일본의 딸 김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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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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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일본의 딸 김활란-

친일파 중 보기 드문 여성인 김활란 박사, 그녀는 과거 이화여자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한국 YWCA를 창설하였다. 이는 그녀의 지위와 권력이 막강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이는 당시 여성으로서 이와 같은 권력과 부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가 친일 행위와 연관 되어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녀는 여성, 교육, 선교, 음악계 등에서 여러 활동을 하였는데, 이러한 활동이 친일 행위라는 점이 그녀의 일생에 오점을 남기게 된 것이다. 물론 그녀의 활동이 친일 행동이었으나 일부 시각에서는 그녀의 영향으로 한국의 여러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졌기에 그녀의 친일 행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찬양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녀의 이와 같은 친일 행위가 과연 한국의 근대화와 발전을 위해서 한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친일 여성의 대표적 인물인 김활란의 친일 행위를 올바로 알고 그녀의 친일 행위를 정당한 행위로 인식하거나 이를 두둔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릇된 역사의식을 바로 잡고, 친일 역사를 청산해야 하는 것이다.

1899년 2월 27일 인천에서 태어난 김활란 박사는 기독교에서 세례를 받으며 세례명 헬렌을 함께 받았다. 활란은 그 세례명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고, 이 이름의 전인 초명은 기득이었다. 그녀는 1907년 이화학당에 입학해 초·중·고등과를 거쳐 1918년 제 5회 졸업생으로 대학과를 졸업하였다. 졸업식 당시 그녀는 “여자의 고등교육과 가정과의 관련”이라는 제목의 졸업연설을 하여 주위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녀는 졸업 후 모교인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유학해 웨슬리언 대학과 보스턴 대학을 졸업하며 이화여자전문학교의 교수로 취임하였다. 당시 그녀는 보스턴 대학교의 대학원에서 “철학과 종교의 관련성”이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수여받는다. 그녀는 또한 교수의 직위에 머물며 여러 가지 기독교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다시 학문의 길로 접어들었고, 마침내 1931년 콜롬비아 사범대학에서 “한국의 부흥을 위한 농어촌 교육”이란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게 된다. 그 후 김활란은 이화여전의 교수로 교직생활을 하다가 부총장이 되었고, 이 때 부터 시작된 일본의 병참기지화 정책, 민족말살 정책, 황민화 정책으로 이화여전도 폐교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활란은 이 위기를 친일행위의 수용으로 벗어나려 했고, 결국 친일파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녀는 1937년부터는 일제와 관련된 일회적인 모임만이 아니라 지속적인 단체 활동에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1937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친일단체인 방송선전협의회·조선부인연구회·애국 금차회 등에 참가하였고, 1941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및 참사로 활동하였다. 이 무렵 〈부인들끼리의 애정과 이해-내선 부인의 애국적 협력을 위하여〉(1939.3), 〈징병제와 반도여성의 각오〉(1942.12), 〈남자에 지지 않게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등의 글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는 한편, 〈여성의 무장〉(1941.12), 〈대동아 건설과 우리 준비〉(1942.2) 등의 주제로 친일 강연을 했다. 또한 기독교 여성단체 중 가장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던 조선 YWCA가 1938년 6월 8일 일본 YWCA에 가맹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바로 이때의 회장이 김활란이었다. 또한 그녀는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지원병 제에서 나아가 징용, 징병, 정신대 등의 강제연행을 시작하자 앞서서 일본을 도우기도 하였다. 그녀는 이때에 여성단체를 만들고 여성명사들을 동원하는 등 여성들도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임전대책협력회 위원,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 국민총력 조선연맹 평의원, 조선교화단체연합회 부인계몽독려반, 조선언론보국회 이사 등 각종 친일단체의 임원직을 맡았고 여성대중에게는 노력동원, 가정의 절약과 저축을 강조하였다. 그녀는 1941년 말 야마기 카쓰란으로 창씨개명까지 하였다. 8·15광복 뒤에는 1945년부터 1961년까지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장 겸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였고, 1950년 공보 처장을 지냈다. 그밖에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 이사장,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한국여학사협회 회장 등 여러 사회단체에서 활동하였고, 국제연합총회 한국대표를 비롯하여 전후 수십 차례 국제회의에 참석하였다. 1963년 막사이사이상 공익 부문상과 미국 감리교에서 수여하는 다락방상을 수상하였고, 외교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1970년 1등 수교훈장이 추서되었다.
내용 출처 및 요약정리 :
*//cafe.naver.com/hojujedo.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352
*//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6&dir_id=615&eid=aPHH4jVn4KF49lFicr9fNVtedrBdyqFT&qb=sejIsLb1
*//100.naver.com/100.nhn?docid=32900

* 부인들끼리의 애정과 이해 - 내선 부인의 애국적 협력을 위하여 (동양지광, 1939. 6월) : … 과거 조선의 부인운동은 어쨌든 화려한 시기가 있긴 있었습니다마는 이제 와서 생각하면 정말로 구호에 불과한 부끄러운 일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내선일체의 대업 속에서 정말로 확고하게 현실성이 있는 부인운동이 전개되어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 여성의 무장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결전부인대회 결성식 부민관 대강당 194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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