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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 한지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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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전통문화] 한지에 관하여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한지에 관하여
2. 한지의 유례
3. 한지의 특성
4. 한지의 원료와 제작법
5. 한지 공예
6. 풍산한지 소개
본문내용
1. 한지에 관하여
한지는 닥나무 껍질을 원료로 하여 만든 우리나라 고유의 수초지(手抄紙 Hand-Made-Korea)를 말한다. 이는 닥나무껍질을 잘게 부수고 갈아서 접착제인 확촉규 뿌리의 점액을 첨가하여, 대나무 발로 떠서 섬유가 서로 얽히게 하여 건조시킨 종이이다.

발이 촘촘하고, 종이가 두꺼우며, 질긴 것이 특징이고, 빛이 희고 좋아서, 신라 때부터 중국에서는 백무지(白無紙)라고 알려졌으며, 송나라 사람들이 종이의 품질을 평가할 때 고려지를 최상의 것으로 여겼다.

이처럼 뛰어난 신라의 제지 기술은 고려시대로 이어져서 더욱 이름을 얻었다. 송나라와 원나라는 섬세하고 희고 빛이 나고 매끄러운 고려 백추지를 많은 양 수입했으며, 중국 역대 제왕의 진적을 기록하는 데에 고려지만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지의 이러한 성가는 조선 전기로 이어졌다. 오죽 종이질이 좋고 명성이 자자했으면 한지가 중국과의 사대외교에 필수품으로까지 한 몫을 했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 와서 신라의 백무지는 기술적으로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고려 인종 23년(1145)부터 명종18년(1188)까지 전국적으로 닥나무재배를 장려하고, 민간 제지업도 지원하였다, 또한 ‘지소’하는 정부의 제지 기관이 설치되어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고종 19년(1882)까지 존속한 조지서는 인쇄술의 발달, 향교, 서원, 서당 등의 설치와 생활 양식의 고급화 등으로 날로 증가하는 종이의 수요를 감당하였다. 종이는 옛날 지폐인 저폐, 서적 출판, 지갑 등과 도배, 습자용 문책 등 그 용도가 매우 다양하였고, 그만큼 수요도 대단했다.

따라서 나라에서 저심기를 장려하였고, 세종 10년 이조실(李朝實)에 의하면 박서생을 일본에서 사신으로 보내 생마를 이용한 제지법을 실습토록 하였고, 성종 6년에도 지장 박비회를 북경에 보내어 생마를 사용하여 만드는 제지법을 배워 오게 하였다. 우리 고유의 제지 기술을 토대로 외국에서 배워 온 방법을 응용하여 여러 가지의 직물을 생산하였다. 한 말 러시아 대장성의 조사보고서인 [한국지]에 조선시대 종이의 특징이 잘 나와 있는데, 그 보고서에는 "한국의 종이는 섬유를 빼어 만들어 지질이 서양 종이처럼 약하지 않으며, 어찌나 질긴지 노끈을 만들어 여러 가지 공작한다. 또한, 종이에 결이 있어 그 결을 찾아 찢지 아니하고는 베처럼 찢어지질 않는다. 한국에서 제지업은 가장 발달한 공업에 속하는데 중국도 따라오지 못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중국에 수출되어 지금도 중국에는 조선 종이로 벽을 바르고 사는 대관들이 많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암미술관 소장의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754년 경덕왕 13년)]에는 "닥나무에 향수를 뿌려가며 길러 껍질을 벗겨내고, 그 껍질을 맷돌로 갈아서 종이를 만든다."라는 기록이 있다.

우리 한지의 우수성을 올리는 이야기 한 토막은 오늘 날도 많은 이들의 입에서 회자괴고 있다. 독일의 쿠텐베르크 성서가 겨우 5백년의 수명을 가지고 열람조차 불가능한 암실에서 모셔져 있는 반면, 수백년 묵은 우리의 고서적들이 박물관이나 도서관 또는 골동품 상가에서 나뒹굴다시피 쌓여 있는 오늘의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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