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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과 당대 신라사회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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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선덕여왕과 당대 신라사회의 이해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즉위 배경
1) 선덕여왕 즉위 이전의 국제 정세
2) 여성 성불론과 선덕여왕
2. 선덕을 둘러싼 귀족갈등
1) 칠숙의 모반
2) 비담의 반란
3) 칠숙의 난과 비담의 난의 이해
3. 선덕 관련 세력과 인물
1) 등장배경
2) 떠오르는 잠룡(潛龍) 김춘추
3) 여왕의 사천왕이 된 김유신
4) 불국토의 건설자 자장
5) 큰 스님 양지
Ⅲ. 결론
1. 선덕의 업적과 평가
1) 문화적 업적
2) 정치적 업적
3) 선덕여왕에 대한 평가
본문내용
당 태종이 우리나라가 학문을 숭상하는 것을 알고 대학자를 순회대사로 삼아 삼국을 돌면서 화친을 도모하도록 유세했다는 내용이다. 주자사의 삼국 순회 후 그 다음해인 정관(貞觀) 1년(627)에 신라는 6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것이고 지금까지도 여왕으로 통칭되고 있는 실정이다. 다른 두 여왕인 진덕여왕(眞德女王)과 진성여왕(眞聖女王)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선덕여왕의 왕명인 󰡐선덕󰡑이란 이름은 물론 불교적인 것으로 불경에 보이는 이름에서 따온 것인데 󰡐선덕󰡑이란 이름을 사용한 사람들은 불경에 여러 명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그녀의 이름은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想經)』에 나오는 선덕바라문을 모범으로 하여 지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선덕바라문은 불법(佛法)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교화할 전륜성왕의 전형으로 인도에 실존했던 아소카왕이 될 인연을 이미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석가모니의 사리를 잘 받들어 섬겨 장차 도리천의 왕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선덕여왕이 죽기 전에 자신은 도리천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는 사실과 바로 연결해볼 수 있다.
그녀는 진평왕의 장녀라고 하는데. 앞서 얘기했듯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龍春)의 부인이자 김춘추의 어머니인 천명(天明)부인이 그녀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의 소생이 아닐 가능성이 있으므로 혹시 천명부인보다 약간 뒤에 태어났을 수도 있다.(『삼국사기』에는 맏딸, 『화랑세기』에는 둘째딸이라고 나온다.) 이 경우 천명부인은 정비가 아닌 후비의 소생일 것이니, 사관(史官)은 그 출생신분 때문에 천명을 장녀로 보지 않고 정비의 소생으로 성골인 덕만을 장녀로 기술했을 것이다.
진평왕 후반, 왕의 뒤를 이을 성골 남자 후계자가 없기 때문에 왕과 측근 신하들은 그녀를 여왕으로 세우기로 내정했는데 진평왕 53년 칠숙(柒宿)과 석품(石品)이 주도한 반란은 그러한 결정에 대한 반발이었다. 진평왕이 죽은 후 그녀는 유력한 신하들의 모임인 화백회의 의결 형식을 밟아 왕으로 추대되었고 신하들은 그녀에게 󰡐성조황고(聖祖皇姑)󰡑 즉 󰡐거룩한 조상을 가진 여황󰡑이라는 칭호를 올렸다. 그녀가 거룩한 성골 왕실의 계통을 이은 여자 대왕임을 밝힌 것이다.
이때 그녀는 적어도 40세를 약간 넘긴 나이였으니 나름의 관록도 쌓였을 것이며 오랫동안 아버지의 측근에 있으면서 정치적 지도력도 갖추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진평왕이 통치할 당시 공주가 정치에 간여했다고 보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으나 적어도 진평왕이 그녀를 후계자로 인정한 이후에는 정치적 훈련을 시켰을 것이다.
즉위 원년(632)에 선덕여왕은 대신인 을제(乙祭)에게 국정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이는 그녀의 즉위과정이 그리 순탄치 않았을 가능성을 내비치는 것인데 아마도 왕위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비교적 지도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이는 을제에게 국정을 총괄케 함으로써 진골귀족들의 반발을 잠재우려 한 조치로 보인다. 내성사신(內省私臣)이자 대장군인 이찬 김용춘에게 정사를 위임할 만도 하지만 그는 아직 오십대로 다른 원로 귀족들에 비해 권력 핵심부 내에서의 정치적 지도력에 한계가 있을 수 있고, 또한 여왕의 왕위계승이 문제되던 시점에서 왕의 친척인 용춘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기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여왕의 재위 2년(633)에는 전해의 가뭄을 이유로 그해의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세금을 면제받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평범한 사람들의 큰 기쁨이니 신라 백성들은 적잖이 기뻐했을 것이다. 여왕의 즉위로 빚어질 사태를 걱정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을 텐데, 이러한 조치로 백성들을 위로하고 민심을 얻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2) 여성 성불론과 선덕여왕

한반도의 역사에서 여왕의 등극은 유독 신라에서만 존재하였다. 신라의 여왕은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 이렇게 3명이 있었다. 보통 선덕이 여성으로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 골품제를 뽑는다. 성골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남성이 없었기 때문에 성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라 하대의 진덕여왕의 경우를 살펴보자. 성골이 사라진 시점에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진골의 남자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성 왕이 등장한다. 따라서 여성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를 골품제라는 신분제 요소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사상이 불교사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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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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