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hwp1.욕망의 지형도를 찾아서:백화점과 편의점
백화점-19세기 중반 당시 급속한 산업 성장과 도시화는 경제의 축을 생산에서 소비로 바꾸어 놓으며, 도시 사람들은 생산과 분리된 소비를 경험하게 되었고 더 많은 사치품들이 과시용으로 소비되기 시작했다.이 시대에 백화점은 도시적 삶의 세련됨과 풍요로움을 상징하며 사람들에게 도시민으로서, 또 소비자로서의 정체성을 교육하는 자본주의의 교육적 장 역할을 했다. 19세기 파리인이 그랬듯이, 지금도 많은 사람이 화려한 백화점을 놀이공원처럼 이용하고 그곳에서 명품을 구입함으로써 부를 과시하고 만족감을 누린다. 백화점에는 경제에 대한 불안이나 시대에 대한 고뇌가 없으며, 값비싼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발생하는 자부심과 상승 지향의 꿈이 양각되어 있을 뿐이다.
편의점-백화점이 호화로운 상승 지향의 욕망으로 양각되었다면, 편의점은 현대인의 일상의 욕망과 고독이 음각되어 있다. 편의점은 도시적 생활양식을 보여주는 욕망의 시간표다.
편의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끊이지 않는 시간의 연속성, 그리고 필요에 최적화된 편리함 등이다. 편의점의 이러한 집약적인 상품 목록과 다양한 서비스가 가능한 것은 편의점이 유톤과 판매에서 최적화된 시스템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도시인들의 욕구와 생활 패턴을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다. 편의점에서는 물건을 고른다기보다는 잘 짜여진 각본에 따라 물건을 구매하는 훈련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지금의 편의점은 옛날 구멍가게와 차이가 있다. 구멍가게에서 물건의 사용가치와 인격이 교환되었다며, 편의점은 시간과 돈이 교환되는 비인격의 공간이다. 편의점은 도시인들의 다양한 욕망의 틈새를 메워주지만 결국 인간적 관계는 매우지 못하는 고립과 단절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이 두 공간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또 다른 이름이 소비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어왔으며 어디에까지 이르렀는지를 보여주는 욕망의 지형도 역할을 한다. 소비와 그 배후의 욕망은 근대 자본주의를 지탱하고 이끌어온 거대한 축이다. 사실 소비는 인간의 본질적 현상이기 때문에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소비가 단순히 생산한 물건을 사용하는 차원을 넘어서 개별적 인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차원으로 전이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히 ‘소비사회’라고 부를 만하다. 문제는 현대인의 독특한 소비 양식을 이끄는 것이 근원을 알 수 없는 욕망이라는 점에 있다. 욕망의 출처가 모호한 것은 이 욕망의 주체의 내부에서 발원한 것이 아니라 밖에서 비추어지고 조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샹들리에가 과시적으로 백화점의 호화로운 상품을 비추듯이, 형광등 아래 편의점의 상품이 정교하게 배열되어 있듯이.
2.차이에 대한 욕구:과시적 소비와 구별짓기
한 스포츠 용품 회사의 유명한 광고 카피 ‘just do it은 지금 당장 해보라며 직설적으로 모종의 실천을 권한다 그러나 이 광고가 말하는 본질적인 도전과 실천의 대상은 스포츠가 아니라 소비행위다. 이 광고 문구는 소비에 대한 현대인의 강박증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나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왜 필요한지 반성할 겨를조차 없이 기회가 닿으면 무조건 강박적으로 구매하는 현대인은 일종의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_. 즉 소비하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돈을 쓰면서 부를 과시하는 이유는 평범함으로 매몰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서이다. 현대인들은 대도시나 대량생산 체계가 만들어내는 획일성에서 벗어나려고, 즉 대도시에 의해 평준화되거나 마모되는 것에서 벗어나려고 자기만의 개성을 추구한다. 어떤 이들에게 소비는 압도하는 사회적 힘에 맞서 존재의 자율성과 개별성을 보존하려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소비는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 되기 원하는가 하는 의식을 만들고 그것을 유지하는 방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연예인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 중에서도 소비를 통해 정체성을 획득하려는 사람이 많다. 사람들이 명품을 선호하는 것은 명품이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사회과학자 베를런은 이를 과시적 소비라고 부른다. 상층계급이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려고 눈에 띄는 소비를 한다는 말이다. 과시적 소비가 나타나는 것은 사람들이 상품 그 자체가 아니라 상품이 지시하는 어떤 이미지를 돈으로 사고자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보드리야르는 소비사회에서 사람들이 단순히 상품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기호를 소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3. 기획된 타자의 욕망
서울을 비롯해 해외 유명 도시에서는 해마다 다음 시즌에 유행할 의상 스타일을 공개하는 성대한 패션쇼가 열린다. 디자이너와 의류 회사들은 미래에 대중이 어떤 옷을 입게 될지 미리 예측하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그들은 무엇이 유행할지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유행시킬지 기획하고 공모하는 것이다. 수요가 있어서 공급이 창출되는 것이 아니라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시스템이다. 대중은 그들이 기획하고 공모한 대로 물건을 구매하고 그것을 마치 자신들이 원해서 선택한 유행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계획되고 기획된 시스템의 일부에서 그저 지갑을 열어 신용카드를 긋는 소비 대행자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생산 체계와 기제가 만들어낸 소비의 질서에 따라, 그 기획되고 설계된 도식에 따라 습관적으로 소비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다면 내 욕망의 진짜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은 대중매체나 명품 회사 또는 자본가가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다. 자본주의의 본질과 운동법칙이 인간의 비판적인 이성을 차단하고 자본주의적인 생산과 소비 시스템의 운용에 원활하도록 개인의 욕망을 기획하고 조정하는 것이다. 프랑스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이러한 현대사회를 소비 조작의 관료사회라고 부른다. 현대인이 타자에 의해 조정되고 교육받고 통제받은 대로 소비를 행하기 때문이다. 소비는 더 큰 시스템에 의해 언제나 관리되고 감독되며 통제된다. 르페브르가 말하는 외부의 시스템은 자본가나 기술 관료, 정치권력이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이지만, 주요한 것은 소비는 단순히 개별적이거나 개인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 특정한 세력이 조작했다기보다는 이미 생산과 소비를 분리시키고 소비를 신화화해서 욕망을 창출하고 이윤을 실현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구조가 소비를 사회화해놓았다고 볼 수 있다. 소비는 코드화된 가치들의 생산 및 교환 체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결혼 예물, 자동차등의 의미는 관련 회사가 개입하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신화화되어 있고 코드화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어떤 물건을 구매하고 소비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욕구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운동의 결과로 사람들이 그것을 욕망하도록 사회화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코드화된 욕망은 소비를 통해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욕망의 뒷면이 결여 또는 부족이라고 생각한다. 결여가 욕망의 원천이라면 결여가 충족되었을 때 욕망도 실현되고 따라서 욕망은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욕망이 실현되는 순간 또 다른 경험을 한다. 하나의 욕구를 채우면 욕구는 충족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소비를 통한 만족은 일시적인 경우가 많다. 곧이어 우리는 더 좋은 제품을 원하게 된다. 물건을 구입하면 그 물건을 돋보이게 할 다른 물건이 필요하기도 하고, 혹 구입한 것이 최신 상품이라고 해도 곧 새로운 기능과 디자인의 신제품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끝없이 이어지며 절제하려는 노력은 현실성이 없거나 힘없는 도덕적 주장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다. 대상이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욕구가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소비할수록 더 많이 소비하고 싶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A를 필요로 해서 A를 구매했는데 그것을 만족이 이루어지지 않고 다시 B를 갖고 싶다면 도대체 나는 무엇을 원했단 말인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물건이나 경험을 아무리 많이 소비해도 결코 만족에 이를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소비가 하나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순간 동시에 또 다른 결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끝없이 생산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윤이 창출되어야 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의 소비는 충족과 결여를 동시에 발생시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욕구가 정착될 수 없는 것은, 즉 증식하고 분열하는 것은 내가 이 욕구의 진정한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한다.
결론적으로 소비를 불러일으키는 욕망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다. 특히 차이를 만들고 다른 집단과 구별 짓기 위한 소비는 실체가 아니라 이미지를 소비하는 관념적 실천에 불과하므로 더더욱 충족되기 어렵다. 이미지로서의 관념은 아무리 소비해도 만족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욕망은 인간에 의해 선별적을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 있는 기제가 되어 의식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살아 있는 유령처럼 스스로 움직이게 된다. 욕망을 소비하는 끝없는 순환을 만드는 주도자는 누구인가? 자본가들이나 권력자들, 기술 관료들인가? 이들은 진정한 욕망의 미래 기획자라고 볼 수 없다. 단지 가치 증식과 이윤 추구라는 자본주의의 자기운동을 대행하는 대행자에 불과하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같은 철학자는 이처럼 스스로 움직이는 자본을 욕망하는 기계라고 부르기도 했다. 욕망의 대행자인 인간도 욕망하는 기계로서 일종의 기계적 흐름에 따르는 수동적인 존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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