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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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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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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43사건 보고서
1. 들어가며
제주도 하면 평화의 섬, 아름다운 섬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그 누가 43을 먼저 생각할 것인가. 그저 아름다워 보이는 제주도에 43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43사건에 대해 말해보라하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43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과 유족들을 제외한다면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이다.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컸던 사건이며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은 사건. 과연 그 날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2. 제주43사건이란
미군 정기에 제주도에서 발생한 제주43사건은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사건 발생 50년이 지나도록 구체적이고 종합적인 진상규명이 이뤄지지 않아 민원이 그치지 않다가 2000년 1월 12일 제주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비로소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에 착수하게 되었다.
사건의 배경은 극히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이 착종되어 있어서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동북아 요충지라는 지리적 특수성이 있는 제주도는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 6만여 명이 주둔했던 전략기지로 변했고, 종전 직후에는 일본군 철수와 외지에 나가있던 제주인 6만여 명의 귀환으로 급격한 인구변동이 있었다. 광복에 대한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수백 명의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의 악재가 겹쳤고,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군정 관리의 모리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74년 31절 발포사건이 터져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31절 발포사건은 경찰이 시위 군중에게 발포해 6명 사망, 8명 중상을 입힌 사건으로, 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일반 주민이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바로 이 사건이 4.3사건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경찰발포에 항의한 ‘3.10 총파업’은 관공서, 민간기업 등 제주도 전체의 직장 95% 이상이 참여한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사태를 중히 여긴 미군정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 이 총파업이 경찰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 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사람들로 교체됐고, 응원경찰과 서청 단원 등이 대거 제주에 내려가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되었고,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되었다. 테러와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에는 일선 지서에서 잇따라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제주사회는 금방 폭발할 것 간은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 노출로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 신진세력들은 군정당국에 등 돌린 민심을 이용해 두 가지 목적, 즉 하나는 조직의 수호와 방어의 수단으로서, 다른 하나는 당면한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구국투쟁’으로서 무장투쟁을 결정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의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이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선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미군정은 초기에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 경찰력과 서청의 종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주한미군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딘 소장은 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다.
한편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무장대측 김달삼과의 ‘428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사태 해결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평화 협상은 우익청년단체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등으로 깨졌다. 미군정은 제 20연대장 브라운 대령과 24군단 작전참모 슈 중령의 제주 파견, 경비대 9연대장 교체 등을 통해 510선거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5월 10일 실시된 총선거에서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그러자 미군정은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최고사령관으로 임명,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며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5월 20일에는 경비대원 21명이 탈영해 무장대 측에 가담하는 사건이 생겼고, 6월 18일 신임 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부하 대원에 의해 암살당한 사건이 발생, 충격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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