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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소보 민족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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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코소보 민족 분쟁 - 분쟁
코소보는 세르비아 공화국내 남서 지방에 위치한 세르비아의 자치주로 있다가, 2008년 2월 17일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일부 나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지 못해 미승인국가에 속한다. 코소보의 거주민 수는 약 1,820,000명이며 알바니아인이 약90%를 차지한다. 나머지는 세르비아인, 무슬림, 집시족 등이 뒤를 잇는다. 코소보 전체 인구의 90%는 이슬람교신자로 알바니아인, 나머지 10%는 세르비아 정교회 신자로 대부분 세르비아인이다.
코소보를 둘러싼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의 갈등과 분쟁은 15세기이후 이 지역이 오스만 터키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 오스만 터키가 지배하기 전, 1217년 세르비아 왕국이 건설되었다. 코소보에는 세르비아인의 정신적 구심점인 세르비아 정교회의 첫 번째 교구인 페치(Pec) 대교구가 설립되었으며 이러한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인들에게 엄청난 종교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15세기말 이후, 코소보 지역이 오스만 터키의 완전 지배 하로 넘어가면서 세르비아인들은 주변 국가들로 이주해야만 했고 오스만 터키의 이주정책에 따라 코소보 지역으로의 알바니아인의 이주 및 이들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화가 가속화되었다.
이후 코소보 지역은 세계2차 대전 무렵에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내 6개 공화국중 하나인 세르비아 영향력 하에 다시 놓이게 되었고, 코소보에서의 역사성과 민족 정체성 보존을 이유로 세르비아가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해나가자 이에 대한 알바니아인들의 반발이 커졌다. 코소보에 자치권을 부여했던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대통령이 사망하자 그동안 잠재되었던 세르비아니즘이 확대되었고 1989년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자치권을 폐지하였다.
1990년대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는 가운데,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1991년 코소보의 독립을 묻는 투표를 실시하였고 새로운 대통령을 임명했지만 세르비아에게 무시당하며 탄압을 받게 된다. 이후 1996년과 1997년, 알바니아 무력 저항 세력은 세르비아 경찰 부대 습격 및 민간인 납치 등의 방법을 통해 세르비아를 압박했다. 이에 따른 UN과 국제 사회의 관심이 커지며 코소보의 평화를 위한 회담이 프랑스에서 이루어졌지만 실패했다. 미국 및 서방세력은 코소보의 행정권을 NATO가 관할하는 대신에 코소보 독립을 3년 뒤로 늦추자는 내용의 평화안을 제시하였지만 세르비아는 평화안에 반대하였고 1999년 3월 미국과 NATO군의 공습으로 코소보 전쟁인 발발하게 된다. 이후 공습이 길어짐에 따른 경제적, 사회적 불안, 그리고 인명피해가 커짐에 따라 1999년 6월 10일, 러시아의 중재로 코소보 평화안에 서로 합의하여 79일간의 코소보 전쟁은 종결되었다.
현재까지도 코소보지역에서의 분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코소보 알바니아인과 세르비아인 모두에게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코소보 지역은 세르비아에게 민족적으로 성역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코소보 지역은 수백년에 걸쳐 90%에 달하는 알바니아인들의 생활터전이 되어온 곳이기도 하다. 두 민족의 타협을 위해서는 국제 사회의 관심과 노력이 더욱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1. 김민철, 2008. 02, “세르비아인의 아픔과 알바니아인의 비극,”『진보적시사종합지』,
pg. 158~161
카자흐스탄의 다문화 공존 - 공존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지역에서 가장 다양한 민족을 가지고 있는 국가로, 카자흐족(63.1%), 러시아인(23.7%), 우크라이나인, 우즈벡인, 독일인, 체첸인, 고려인, 그리고 위그르인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인구구성은 193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소련에서 특정 소수민족인 볼가 독일인, 폴란드인, 우크라니아인, 크림 타타르족, 칼믹족이 ‘조셉스탈린’에 의한 집단 명령에 의해 강제 이주됨에 EK라 이루어졌다.
유목의 전통과 관습을 가지고 있는 카자흐 족은 15세기 카자흐 칸국이 국가를 수립하였다. 19세기에 제정 러시아는 영국을 이기고 현재의 카자흐스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당시 제정 러시아는 카자흐스탄의 모든 교육 및 정부기관에서의 러시아어 사용을 실시하였다. 카자흐 고유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1830년대 이후 제정 러시아로부터 집단 이주민들이 오늘날의 카자흐스탄의 세미레치에 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1925년에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이 성립되었고, 1936년에는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되어었다가, 1991년 12월 16일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1992년 3월 독립국가연합(CIS)에 가입했다.
독립이후 정부는 국가건설의 방향을 이슬람의 종교적 요소와 유목문화를 기반으로 한 민족정체성 확립으로 잡았다. 7세기 아랍 민족에 의해 전파된 이슬람은 정착 민족들에게 비교적 잘 수용되었지만 유목민족에게는 변형된 과정을 거치게 되었고, 유목민들은 전통적인 무속(샤머니즘) 및 자연신 숭배 풍속을 이슬람의 관습과 도덕적 가치의 연장선상에서 수용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독립이후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상황에서 안정된 다문화사회를 만들기 위해 카자흐스탄 정부는 전통적 유목 문화와 이슬람의 가치가 다른 문화 및 종교와 조화를 이루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이미 이 지역에 정착된 이슬람의 교의와 샤머니즘, 그리고 기독교적 금욕주의가 결합하여 토착화된 수피즘은 국민정서를 결집시켰다. 이슬람이 종교적 교의보다는 도덕적 가치로 인식되면서, 카자흐스탄 국민들은 생활 속의 종교철학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카자흐 사회적 공동체를 통합하는 원천은 이슬람과 민족문화의 가치체계가 장기적으로 공유한 점을 들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다문화의 공존이 국가정체성의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인위적으로 다인종이 통합된 나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종 및 타문화와의 위화감 및 갈등이 충분히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소련으로부터 독립 후 카자흐스탄은 이슬람의 도덕적 가치와 유목민족 문화를 토대로 적극적인 국가건설을 통해 안정적인 다문화사회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보아할 때 카자흐스탄은 다민족적 특성이 두드러져 보이며 타 지역과는 다르게 큰 분쟁 없이 다문화의 공전을 이뤘다는 점이 인상 깊다.

1. 김중관, 윤희중, 2014. 02, “카자흐스탄의 다문화 공존정책: 다종교현상에 대한 인구사회학적 분석.” 『한국중동학회논총』. 제34권 4호, pg. 2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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