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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사 토론문 조선 전기소설에 대한 고찰 과정에서 얻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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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국문학사 토론문 조선 전기소설에 대한 고찰 과정에서 얻은 것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지난 시간에 이어 조선 전기의 문학에 대한 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금오신화의 성격과 몽유록의 장르 규정, 홍길동전의 성격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이번에 논의 주제로 등장한 소설들은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나 문제집에서 여러 번 본 소설이라 참 반가웠다. 그때는 소설 일부를 읽고 줄거리와 내용 특성을 정리하는 것만 했고 그것이 국문학의 전부인줄로만 알았는데 작품의 다른 면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색다르고 즐거웠다.
이번 시간에 첫 번째로 논의되었던 주제는 「금오신화」가 중국의 「전등신화」를 모방한 것인가, 아니면 「전등신화」의 영향 속에서 창작된 것인가였다. 고등학교 때 만복사저포기나 이생규장전을 보면서 귀신이 소설의 주인공이고 다른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다니 참 괴이하다고 생각한 기억이 있다. 고전소설에서 영웅을 등장시켜 현실에서는 맛볼 수 없는 통쾌함을 느끼게 한다든가 아니면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인기 있는 연애소설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귀신이 등장하고 거기다 귀신과 사랑에 빠진다니…….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어디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썼는지 궁금해 한 기억이 난다. 우리는 논의 끝에 금오신화는 모방이기보다는 창조적 모방에 가깝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선녀나 염왕, 귀신과 사랑 같은 소재는 같지만, 그 안에는 홍건적의 난 같은 우리만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외에도 분량에 있어서도 금오신화의 각 소설이 훨씬 길고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그대로 모방했다고 하기에는 흐름에서 유사성을 찾기 힘들다는 점이 있었다. 남염부주지의 경우에는 염왕 앞에서 얘기한다는 것은 같으나 현실을 비판하는 작가만의 생각이 분명히 담겨있어서 영호생명몽록과 같은 이야기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교수님의 말씀처럼 김시습이 「전등신화」를 즐겨 읽고 사탕수수처럼 달콤하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볼 때 금오신화가 전등신화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인간은 주변 모든 것들로부터 독립적일 수 없기 때문에 완전한 창작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힘들고 김시습의 「금오신화」 역시 그런 면에서 창조적 모방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음으로 집중했던 부분은 금오신화의 사상적 성격이었다. 먼저 김시습이라는 작가가 어떤 사람인가 살펴보았는데 참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유교를 마음에 담고서도 불교의 자취를 쫓았다고 한다. 그래서 작품에는 유·불·도적인 사상이 모두 반영되어 있고 무엇보다 불교를 성리학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도가에 비판적이었다는 부분은 의문스러워 논의해보았다. 선녀를 만난 것이나 산에 들어가서 신선이 된 것으로 볼 때 오히려 도가적 사상이 내용에 반영되어 있는 것 같은데 어느 면에서 비판적인지 궁금했다. 이에 대해서 교수님 역시 도가비판적인 부분은 찾기 어려우며 오히려 불교와 도교는 비슷한 면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전에는 고소설을 보게 되는 경우가 교과서나 문제집에서 시험 준비를 위한 것이어서 작품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작품에 반영된 사상들을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찾아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현실주의적 세계관으로 볼 때는 소설의 비현실적인 요소들이 비유적이고 역설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결말부는 욕구가 좌절되는 비극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일원론적주기론으로 볼 때는 고독한 예외자가 자신의 뜻대로 관철하기 위해 세계와 대립하는 것이 된다. 「금오신화」를 현실주의적으로 볼 때는 한계가 있긴 했지만, 작품을 이렇게도 바라보고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다. 여러 관점에서 작품을 바라본다는 것은 배웠지만, 시험을 위한 공부였기 때문에 실제로 문학작품을 그렇게 본 경험은 없었던 것 같다. 하나의 작품을 가지고서도 이렇게 많은 논의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들의 국어수업이나 문학에 대한 흥미도가 떨어져 가던데 이렇게 여러 관점으로 바라보고 다양한 생각을 나누는 활동을 한다면 밑줄을 긋고 외울 때보다 훨씬 더 국문학과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는 몽유록의 장르규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꿈과 관련된 소설하면 고등학교 때 몽자류 소설로 「구운몽」을 배운 것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 이번 시간에는 그 소설에 대해 살펴보기보다는 몽유록계 소설의 장르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에 대해 알아보았다. 몽유록계소설은 ‘입몽-몽유-각몽의 구분이 있어야 하는 반면 몽자류 소설은 입몽, 각몽의 구분이 없어도 꿈이 나오면 몽자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몽유록계 소설은 현세와 몽중 세계가 구분되어 있고 몽자류 소설에서는 현세와 몽중 세계를 같게 본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본 것은 홍길동전의 성격이었다. 홍길동전의 성격을 정의하기 위해 저자는 누구인지, 홍길동전은 어떤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지, 소설의 배경과 주제는 어떤지 등을 알아보았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홍길동전이 허균의 작품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허균의 가택을 조사했을 때 홍길동전은 발견되지 않았고 「택당집」에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라는 기록만이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것의 증거라고 한다. 그리고 다른 부정할만한 명확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현재까지 허균의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허균이 지은 것이라 배워왔는데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놀라웠다. 교수님께 홍길동전의 내용에 대해 더 들을 수 있었는데 뒷부분으로 가면 괴수를 물리치는 괴이한 부분이 나오기도 하고, 결말부에서 율도국의 왕이 된 길동이 장자에게 왕을 물려주며 끝이 난다고 한다. 갑자기 괴수가 나오는 것도 이상하고 앞부분에서 서출로 차별받던 길동이 왕이 되어서는 장자에게 왕을 물려주는 것도 주제의식 면에서 일관성이 없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정말 이 소설을 허균이 지은 것이 맞을까하는 의심이 더 짙어졌다. 교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택당집」은 택당선생이 쓴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 의해 간행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허균이 홍길동전을 지었다.”는 말은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한다. 허균의 이름으로 다른 누군가가 홍길동전을 지은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으로 논의는 끝이 났다.
조선전기 소설에 대해 발표를 듣고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배웠던 국문학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우리 국문학에 대해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이 진리처럼 반드시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답이라고 정리된 것들을 읽고 외운 것이 내가 한 국어공부였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처음 국문학사 강의가 시작되었을 때 ‘왜 이런 것들을 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초반에 마주하게 된 것은 ‘사뇌가는 향가와 동의어인가?’ 같은 문제였는데 “어째서 이걸 따져봐야 하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나에게 국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하나의 결론이 나 있는 것을 함께 보고 암기하는 것이었고 확실하지 않아 논의 중에 있는 것은 시험에 나오지 않았다. 아니면 시험을 출제하시는 선생님의 말씀을 정답처럼 적어놓고 외웠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학자들이 하나의 작품, 그것도 그 안의 세세한 용어를 두고서 논쟁을 펼치는 것이 굉장히 낯설었다. 그런데 한 주 한 주 지날 때마다 수업이 쌓이면서 이제는 내가 공부라고 생각하던 것을 바꿀 때라는 것을 느꼈다. 내가 해야 할 공부들은 단순히 외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야 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고대문학부터 이전에는 내가 생각해보지 않았던 면들을 살펴보며 정말로 그동안의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토론에서 역시 조선전기 소설들을 살펴보며 ’생각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