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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이론적배경과의의실생활에서의예와수업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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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공리주의 이론적배경과의의실생활에서의예와수업적용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공리주의는 공리성을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하는 사상이다. 곧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위가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늘리는 데 얼마나 기여하는가 하는 유용성과 결과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넓은 의미에서 공리주의는 효용·행복 등의 쾌락에 최대의 가치를 두는 철학·사상적 경향을 통칭한다. 하지만 고유한 의미에서의 공리주의는 19세기 영국에서 벤담, 제임스 밀, 존 스튜어트 밀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사회사상을 가리킨다.
공리주의는 인간을 언제나 쾌락(행복)을 추구하고 고통(불행)을 피하려 하는 본성을 지닌 존재로 파악한다. 인간 행동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기준도 이러한 공리적 인간관에 기초하는데, 이에 따르면 인간의 쾌락과 행복을 늘리는 데 기여하는 것은 선한 행위이지만, 고통과 불행을 크게 하는 것은 악한 행위이다. 나아가 사회의 행복을 최대로 하려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가능한 한 많은 행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공리주의의 목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실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오늘에 이르러 공리주의는 실용주의, 현실주의, 합리주의와 결합하면서 가치 기준을 넘어 사회를 지배하는 법칙으로 기능하고 있다. 특히 공리주의가 지닌 공리의 원칙과 유용성의 원칙은 사회적 효율성을 강조하는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의 생명공학, 사형제도, 안락사 문제와 평화와 관련된 국제 문제에 이르기까지 공리적 판단과 결부되지 않은 것이 없다. 법이나 정치제도, 도덕, 종교 모두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기여하는 여부에 따라서 그 정당성이 판단될 뿐이었다.
공리주의를 대변하는 양대축에서 먼저 양적 공리주의를 주장했던 벤담의 공리주의를 살펴보면, 그의 이론은 효용과 최대 행복의 원리를 도덕의 기초로 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권자의 지배하에 두어왔다.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지시하고 또 우리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다만 고통과 쾌락뿐이다.”라고 말했다. 더 나아가 인간에 있어서 선악의 기준은 바로 이 쾌락과 고통에 따라 결정되며, 인간 행위의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은 그 행위의 결과로서 산출되는 고통과 쾌락의 양에 의해서 가름되어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행위의 가치판단의 근거를 설정하였다. 따라서 공리성의 원리의 가장 기초적인 전제는 인류에 대한 고통과 쾌락의 지배 또는 인류의 고통과 쾌락에 대한 종속을 인정하고 이를 모든 사상체계의 근거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벤담에게 행복이란 다름 아닌 쾌락이고, 고통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또한 사회는 개인의 집합체이므로 개개인의 행복은 사회 전체의 행복과 연결되며, 더 많은 사람이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은 그만큼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른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도덕과 입법의 원리로 제시했다. 그리고 모든 쾌락이 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생각한 벤담은 쾌락과 고통을 측정 할 수 있는 계산법까지 제시하였다.
내가 실생활에서 겪었던 일들 중 많은 부분이 벤담의 양적 공리주의에 부합한다. 예를 들면, 나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와 집이 먼 관계로 부모님이 차를 태워주셨는데 학교를 가는 길에 친구들이 사는 지점을 몇 군데 지나쳐 갔다. 그 친구들은 정해진 시간에 꼭 집 앞으로 나와서 나와 함께 학교에 가겠다고 했고, 부모님과 나는 이에 동의했다. 그래서 나는 매일 두셋의 친구들을 부모님이 모는 차에 태우고 다녔다. 이로인해 나나 부모님의 행복은 줄어들지 않았고, 고통을 받은 적도 없다. 반면에 친구들은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는 효과를 얻었기 때문에 행복이 늘어났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 친구에게 좋은 일을 하였고 사회 전체적으로 보아서도 친구의 행복을 증가시켜 주기도 했으므로 도덕적으로 선한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뒷받침해주는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전체의 쾌락이 증대 되었다고 해서 쾌락의 개인적 분포가 균등해지지는 않는다. 거기다 벤담과 같이 극단적 경제적 자유 확대를 통해 공리를 추구하다 보면 소유 불평등의 한계점에 도달하게 된다. 이 당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공리주의에 수정을 가한 것이 밀이다. 밀은 벤담처럼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행복으로 보면서도, 쾌락의 양만을 중시한 것이 아니라 그 질적 차이도 고려해야 한다고 하며 질적 공리주의를 주장하였다. 예컨대, 감각적 쾌락보다는 정신적 쾌락이 더 수준 높은 쾌락이라고 하였다. 그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질적으로 높고 고상한 쾌락을 더 추구한다고 보았다. 그는 개인 간의 질적 차이가 존재함으로 사회적 쾌락의 총계는 사회제도의 수준에 따라 다르다고 본 것이다. 다시 말해 빈곤계층의 지원을 통해 증대되는 쾌락의 질은 상위계층의 부의 증대로 인해 발생하는 쾌락의 질보다 커 결과적으로 전체 사회 쾌락의 수준을 증대시키고 이것이 공리주의의 원칙에 더욱 합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높이 평가한 것은 이러한 논리의 귀결이다.
이에 대한 나의 경험으로 동네 꼬마아이를 짓궂게 괴롭히면서 얻었던 쾌락이 떠오른다. 내가 좋아하는 취미활동 예를 들어 라운지 음악을 듣는다던가 연극을 보러 간다던가 하면서 얻는 쾌락과 순진한 어린아이를 쥐어박고 놀리며 얻는 쾌락은 분명 질적으로 엄연한 차이가 있다. 밀의 이론에서는 감각적 쾌락보다는 정신적 쾌락이 더 높은 수준의 쾌락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리주의에는 많은 한계점이 따르는데, 첫째로 같은 잣대로 모든 것을 계산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공리주의가 그 원칙에서는 매력적인 이론처럼 보이지만 행복은 사람에 따라,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바뀌는 것으로 각자의 행복이나 다수의 행복을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멋지게 득점하는 것을 지켜보는 야구팬이 느끼는 행복과 자기가 좋아하는 뽕짝을 듣고 있는 아저씨가 경험하는 행복이 어떻게 비교될 수 있는가? 또한 공리주의에 비추어 보면, 비도덕적인 행위마저 정당화할 수 있다. 일부 성원을 노예로 만들면서 더 많은 부를 누리는 사회가 나을까 아니면 조금 가난하더라도 노예가 없는 사회가 나을까? 만약 노예 체제가 노예 없는 사회보다 더 많은 행복을 산출한다는 계산이 나온다면 공리주의자들은 아무런 주저 없이 노예 체제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희생될 수 있다. 공리주의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산출하게끔 행위 해야만 한다.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돌아갈 행복의 총량만을 계산하기 때문에 소수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희생될 수도 있다. 이는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필요에 따라 일부 구성원들이 해를 보아도 좋다는 것으로 왜곡될 우려가 크다.
요즘처럼 도덕적 아노미 상태를 겪고 있는 사회에서 이러한 공리주의를 수업시간에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나는 다수결의 원칙을 통해 알려주는 것이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를들면 초등학교 5학년 단원중에서 ‘서로 다른 주장’ 이라는 주제로 ‘토끼들의 겨울나기’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토끼들이 겨울을 나는 방법을 정하는 데 있어 서로의 생각이 각기 다르자 다수결의 원칙을 통해 하나의 결론을 얻었지만 그에 동의하지 않는 토끼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토끼들이 갖고 있는 문제는 무엇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절차를 거쳤는지, 만약 나의 경우라면 어떻게 했을지에 대해 이야기해 봄으로써 어떠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어떤 민주적 절차를 걸쳐야 하는지 알려주고,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없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다수결의 원칙임을 알려줄 수 있다. 많은 의견들이 대립 될 때는 다수결로 결정을 내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 학생들에게 지도 할 때 중요한 것은 무조건 다수의 의견이 옳다는 생각보다 소수의 의견도 존중하고, 배려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 공동의 이익을 위해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생각하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인식시켜 준다면, 학생들이 앞으로 그런 상황에 있어서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공리주의는 우리사회에서 특히 의사결정을 할 때는 가장 많이 쓰이는 이론이고, ‘다수결의 원칙’은 우리 모두에게 최선의 방법이라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다 보니 사실상 다수에 반하는 소수는 무시되거나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 레포트를 쓰면서 내 경험 사례를 떠올려 봤을 때도 공리주의의 문제점들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모두가 만족하는 결정을 한다는 것은 참 어렵다. 특히 다양한 이익이 대립되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이럴 때 가장 좋은 것은 공리주의의 말대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만족하는, 행복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수가 나머지 소수를 조금씩만 배려한다면 더 이상적인 공리주의의 실현이 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