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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무속신앙의 개념 역사 특징 종교성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무속신앙의 개념
Ⅱ 무속신앙의 역사
Ⅲ 무속신앙의 특징
Ⅳ 무속신앙의 종교성
Ⅴ 결론
본문내용
무당과 굿은 금지령은 이어 성종 때 다시 4개조로 공포되고 그 3년 후 서울 내에서의 굿 금지법이 내려졌으며 그리고 또다시 성종 9년에 무당과 굿을 엄금하였다. 중종조에도 무당과 굿의 금지령은 여러 차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세종 때 금지조례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계속하여 금지령을 내려야 했던 이유는 그 금지령이 효력을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 외에 달리 설명할 수 없다. 세종은 그 금지조례를 내리기 몇 달 전 별기은과 마제 등의 굿을 행하지 말라고 교시하면서도 “무당의 일이란 심히 괴이하여 마땅히 금지해야 하나 옛날에 비롯하여 조종이 막지 못했는데 어찌 오늘에 당장 없애버릴 수 있겠는가, 나는 그것을 점차로 없애나가겠다”고 언명하고 있다. 무의 금지령을 계속 내리고 강화하고자 한 것은 실은 유학자들의 뜻이었다. 이에 대해 성종도 “비록 금법을 세웠다 하나 신사(굿)가 세속에 행하여진 것이 이미 오래니 갑자기 혁파할 수 없다”하여 온건한 태도를 보였다. 여기서 무 탄압의 성격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그것은 새 왕조의 초기부터 성리학을 국가의 정치이념으로 확고히 하려는 지배층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반면 왕실을 비롯한 백성과 부녀자 층은 그 금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를 신봉하고 굿을 즐겨 하였다. 국왕들은 전통신앙과 새로운 정치이념이라는 이질적인 두 가치관 사이에서 온건개혁파의 입장을 취한다. 이러한 역학관계에서 무는 지배층의 끊임없는 억압과 천대를 받아가면서도 비 유교적 사회계층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끝내 생명을 부지해 간 것이다. 그 점은 무의 금압의 마지막 양상인 무당의 축출에서도 여실하다. 무당의 축출은 세종 때부터 시작되어 조선왕조 말까지 계속되었던 바, 대개 무당을 경성 문밖으로 내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쫓긴 무당들은 그러면 성밖에 무당집단 내지 마을을 이루어 살면서 종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유학자들은 금압이 조금만 늦추어져도 무당들이 다시 몰래 성안에 들어와 곳곳에 숨어살며 부도덕한 무업(巫業)을 자행한다고 성토하였다. 그들은 비난의 화살을 주로 무당에게만 집중시켰으나, 무라고 하는 전통종교의 신봉자계층이 왕실과 민중과 심지어 사대부집안의 부녀자에 걸쳐 있음을 짐짓 간과하거나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밖에 의학의 발달이 부진하였던 당시 특히 전염병이 났을 때 치병의 기능을 가진 무당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다 새 무당이 성안에서도 계속 생겨나고 있음을 유학자들은 모르고 있었다. 앞에서 설명한 사례들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조선 초기의 무 탄압은 미묘한 성격의 것이 된다. 중앙정부의 무당탄압이란 고작 경성 안에 제한된 국지적이고도 상징적인 조치였다. 조선조 말 고종 때의 단발령도 겨우 경성 안에서만 유효하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한편 유학자들은 무당을 천민으로 만들어 부단히 사회적인 격리를 도모하였으니 실로 교묘하고도 실질적인 무의 탄압이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