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 머신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1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1
 2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2
 3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3
 4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4
 5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5
 6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6
 7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7
 8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8
 9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9
 10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10
 11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11
 12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12
 13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13
 14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14
 15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15
 16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16
 17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17
 18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18
 19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19
 20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20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조만식 -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 조만식의 일생(총5p)
2. 해방직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총11p)
3. 조만식의 정치생활 위기(총2p)
4. 조만식의 정치생활 몰락(총6p)
5. 해방후 조만식의 정치적 활동 요약(총3p)
6. 조만식에 대한 평가(총1p)
7. 기타(총7p)
목 차
본관 창녕(昌寧). 호 고당(古堂). 1883년 평안남도 강서(江西)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평양 숭실중학에 입학, 재학 중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중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3년간 영어를 공부하였는데, 그 때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에 감동을 받아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정주의 오산학교교사로 있다가 1915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을 사직하고 3 ·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조만식의 일생(1-5)
1921년 평양그리스도청년회 총무와 산정현교회 장로가 되었다. 1922년 오윤선과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였다. 1923년 김성수 ·송진우와 함께 연정회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실패, 그 후 숭인중학 교장이 되었으나 1926년 일제의 압력으로 사직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결성에 참여하였으나 역시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체육회 회장,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어 민족언론창달에 공헌하고 무저항민족주의운동을 지도하였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지원병제를 실시하면서 그를 이용하여 민심을 회유해 보려던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면담을 거절하고 구금되었다 곧 석방되었다.
조만식의 일생(2-5)
1945년 8월 26일 광복 직후 조만식이 주도한 평안남도 건준 지부와 현준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에서 각각 16명의 위원을 선정하여 인민정치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조만식은 위원장이 되고, 오윤선과 현준혁이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조만식은 재정부장으로 선임되었다. 소련군정청에서는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를 설치하고 그에게 위원장 취임을 권유하였으나 거부하였다.
1945년 11월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가 되어 반공노선과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펼쳤다. 조만식은 광복 당시 북조선 지역에서 유력한 지도자였고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소련 측은 1946년 1월 2일, 4일, 5일의 세차례에 걸쳐 조만식에게 새로 수립될 정부의 대통령 자리까지 제시하면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할 것을 요청했다.
조만식의 일생(3-5)
1946년 1월 5일 이후에도 기독교인 중심의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반탁 운동을 벌이던 조만식은 뜻을 바꾸지 않았고, 북조선에서 정권을 잡은 김일성 세력에 의해 곧바로 인민정치위원회에서 축출된 뒤 고려호텔에 연금된 것을 시작으로 한국 전쟁 때까지 투옥되어 있었다.
1950년 6월 10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보름 전에 북조선에서는 김삼룡과 이주하를 조만식과 38선에서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북조선 부수상 겸 외무상인 박헌영의 강력한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1950년 6월 16일 이승만은 북에서 먼저 보내라는 요구를 했고, 6월 18일 북조선은 동시교환을 주장했다. 한동안 “먼저 보내라,” “아니다. 동시에 교환하자”라는 공방을 되풀이하였다.
조만식의 일생(4-5)
1950년 10월 15일 한국 전쟁 발발 후 조만식은 북조선 내무성 안에서 일단의 내무서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10월 18일에 총살되었다는 설도 있다(박길룡 증언).
김일성 세력과 마찰을 빚던 즈음부터 남한 우익 세력들과 미군정,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반탁 운동의 기수로 신망이 높은 그를 월남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했으나, 조만식은 월남을 거부했다. 고려호텔 연금 기간 동안 그와 함께 있던 차남 조연창과 사위 강의홍은 한국 전쟁 직전에 투옥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행방은 묘연하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1991년 국립묘지에 유발이 안장되었다.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과 파주의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동상이, 저동에는 고당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조만식의 일생(5-5)
해방 후 이승만, 김구와 함께 조선 민족주의 운동의 3대 거목으로 불린 조만식은 북한 민족주의 세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서북 지역에는 민족주의세력 가운데서도 기독교도들의 기반이 매우 강했으며 기독교 장로인 조만식은 해방과 함께 자연스럽게 북한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일제 말기 조만식은 식민지권력에 반대한 소극적인 저항의 의미에서 ‘은거’ 생활을 택했는데, 이 ‘무저항적인’ 태도를 두고 친일 여부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해방 직후 정치적 활동(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