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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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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러일전쟁
1. 러일전쟁이 발생한 원인(배경)
우선 일본은 임오군란에 의해 체결한 제물포 조약 덕분에 자국의 군대를 한반도에 주둔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톈진조약에 의해 청군이 조선에 출병할 시 자국도 군대를 출병할 수 있었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청군이 출병하자 일본도 출병해 청일전쟁이 발생하였는데, 이 때 일본이 승리하여 조선에서의 일본의 입지가 매우 강화되었다.
이 청일전쟁의 결과 한반도에서 청국이 떠나자 러시아가 등장하였다. 러시아는 요동반도를 할양받으려는 일본에 대해서 독일 및 프랑스와 더불어 반도의 환부를 요구하고, 이를 실현시켜(삼국간섭, 1895) 일본의 만주 진출을 저지하였다. 이 삼국간섭에 일본이 굴복하는 것을 목격한 조선 정계에서는 배일친러의 기운이 싹트게 되었고, 명성황후는 이를 이용하여 일본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조선 정계에 친러파가 득세하고 친일파가 축출되자 위기를 느낀 일본은 군인 출신의 미우라를 통해 명성황후를 제거하고 시신을 소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을미사변, 1895).
그 뒤 조선 정계엔 다시 친일파가 득세하였다. 을미사변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친일내각은 을미개혁을 잔행하여 분위기를 바로잡으려 하였다. 친일내각은 1895년 11월 17일 태양력의 사용, 종두법과 우편제도의 실시, 군제의 개편 및 단발령을 발표하고, 이를 1896년 1월 1일부터 시행한다고 공포하였다. 그에따라 조선 정부는 민중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국 각지에 순검을 파견하여 강제로 머리를 깎았다. 민중들은 을미개혁, 특히 단발령에 크게 반대하였다. 특히 유생들의 반발이 심해서, 이들은 의병을 일으켜 친일파와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친일 내각은 중앙군과 일본군을 지방으로 파견하여 의병을 진압하려고 하였다.
친일 내각이 의병 진압에 여념이 없자 친러 세력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1896, 아관파천). 아관파천후에 친일파 인사들은 역적으로 몰려 친일 세력의 중심이었던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 등이 살해되고, 유배되었다. 이범진과 이완용, 이윤용의 새 내각은 개혁을 반대, 단발령을 폐지하였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동안 일본은 이권 사업에서 배제되었다. 그리고 조선은 자주적 개혁을 추구하려는 의도하에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러시아는 중국의 의화단 사건이 만주까지 확대되자 동청철도의 보호를 명목으로 17만의 병력을 만주에 진주시켰다. 이에 만주로 진출하고자 하는 일본과의 사이가 악화되었다. 양국은 이해관계를 조정하고자 하였으나 타협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고, 러시아가 시간을 끌고 있다고 생각한 일본은 당시 즉각 동원 가능한 현지 해군력과 육군, 그리고 철도 등을 이용한 지원 능력은 일본이 우세하다고 판단하여 1904년 2월 8일 야간에 여순항의 러시아 극동 해군을 기습 공격, 2월 10일에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러시아는 당시 내부의 볼셰비키 혁명의 확산을 저지하는 데 외부의 전쟁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일본은 단기전에서의 승리만큼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2. 전체적 전쟁경과
일본과의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의 러시아 공사관이 철수하여 한국은 일본의 후방 요충지로 변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용구, 송병준 등의 친일파들이 일진회를 결성하여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벌써부터 톡톡히 해내었다.
1904년 2월 4일 일본은 대(對)러시아 개전(開戰), 국교단절을 결정하고, 8일에는 육군 선발대가 한국의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향하고, 한편 뤼순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어 10일 러 ·일 양국으로부터 선전 포고되었다. 서전에서 일본군은 한국을 제압하고, 한국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요해 유리한 전략체제를 확립하였다.
4월 하순 한국에 상륙, 북상한 일본 제1군은 5월 초 압록강 연안에서 러시아군과 충돌하여 격파했고, 같은 달 요동반도[遼東半島]에 상륙한 제2군은 난산[南山] ·다롄[大連]을 점령하고 뤼순을 고립시켰다. 다시 6월에는 만주군 일본총사령부를 설치하고 15개 사단을 동원하였다. 8월 랴오양[遼陽] 부근에서 양국군이 첫번째 대규모적인 접전을 벌였고, 10월의 사허후이전투[沙河會戰鬪], 1905년 1월의 헤이거우타이전[黑溝臺戰] 등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고전 끝에 모두 승리하였다.
한편 뤼순의 러시아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을 꾀하였으나, 8월 황해에서 일본 해군의 총공격을 받고 항구 안에 봉쇄당하였다. 뤼순 공략을 맡은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의 제3군은 여러 차례에 걸친 203고지 공격으로 많은 손실을 보았지만 1905년 1월 드디어 공략에 성공하였다. 유럽으로부터 지원군을 얻은 크로파트킹 지휘하의 러시아군 32만과 오야마 이와오[大山嚴]가 이끄는 일본군 25만은 3월에 펑톈[奉天:현 瀋陽]에서 회전(會戰), 러시아군이 패퇴하였으나 일본군도 사상자가 7만에 이르는 큰 손실을 보았다. 한편 러시아는 육전(陸戰)에서의 패배를 해전에서 만회하려고 로제스트벤스키 지휘하의 발틱함대를 회항시켜 5월 27,28일 대한해협에서 대해전을 전개하였으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에 격파되어 전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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