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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석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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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시인 신석초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신석초
1. 생애 및 작품활동
신석초는 1909년 6월 4일 충남 서천군 한산면에서 부친 신긍우와 모친 강긍선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본명은 응식으로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유년 생활을 하였고, 아호는 주로 석초(石艸) 신석초는 에 석초(石初)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했지만, 이후 석초(石艸)로 변경하여 1937년 「호접」을 발표했다. 그가 훗날 石艸라는 필명을 굳이 고집한 까닭은 첫째, 형식미이다. 본명 신응식(申應植)이라는 글자는 획수가 많아 쓰기가 불편할 뿐만 아니라 시각적 미감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가가 ‘초’를 草가 아니라 옛글자인 艸를 고집한 이유도 草가 자신이 의도하는 의미를 시적으로 드러내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째, 둘째, 언어가 내포하는 의미이다. 석초(石艸)는 선조인 석북 신광수의 호에서 석(石)을, 석불 선생의 뜻을 좇겠다는 의미에서 艸(초)를 사용한 것이다.
로 써 왔다. 석북 신광수의 후손답게 그의 가계는 사대부 가문으로서의 명성을 내내 유지했다. 그의 부친은 두 사람의 가정교사를 두고 한학과 신학문을 동시에 교육시켰다. 석초의 부친은 권국담 선생을 초빙하여 석초의 한학 지도를 부탁했다. 국담 선생이 석초에게 한문적 감수성을 제공했다면 할머니는 고전소설의 감흥을 전수해주었다. 1921년 석초는 정규과정을 거치지 않고 한산초등학교 2학년에 입학했다. 1925년 4월4일 석초는 검정고시를 거쳐 경성 제1고보에 입학하였고, 1925년 봄에 2세 연상 강영식과 혼인을 하였다.1929년 유학길에 올라 체류하며 학업에 전념한 그는 1931년 법률을 전공하라는 부친의 의사와는 달리 일본 법정대학의 철학과에 수학했다. 이 무렵 철학을 공부하던 중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카프(KAPF)에 가입하여 안막, 박영희 등과 교류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깊이 경도되어 있었다.
1931년 신유인이라는 필명으로 중앙일보에 평론 「문학창작의 고정화에 향하여」를 발표했다. 이 때 일제의 탄압으로 카프는 큰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석초는 개념화 되어가는 카프 문학의 고정화를 비판하고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을 주장하고서 예술적 형상화에 관한 인식의 문제를 강조했는데, 카프 내부의 소장파들에 비난을 받게 된다. 1933년 탈퇴원을 제출한 그는 우연히 발레리의 「테스트시」를 읽고 크게 영향을 받아 학교도 포기하고 발레리를 읽기 위해 프랑스어의 개인교수를 받았다. 발레리에게 노장사상의 영향이 있음을 발견, 자신도 노장사상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면서 틈틈이 시를 쓰다가 1934년, 우연히 『신조선』편집을 담당하면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이 때 석초(石初)라는 필명으로 「비취단장」, 「밀도를 준다」등을 발표했다.
그의 시작활동은 1935년부터 본격화 되는데 이 때 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 위당 정인보다. 석초는 서구적인 것은 프랑스 발레리에게, 전통적인 것은 위당 정인보 석초의 학문적 성향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위당의 영향으로 관념적 실천을 보다 세련되게 연마할 계기를 마련 할 수 있었다.
에서 시세계를 구축해나갔다. 1935년 정인보의 소개로 시인 이육사를 사귀게 되었고, 육사를 통해 1935년부터 1940년까지 동인지 『자오선』『시학』『문장』 등에 발표됨 이때의 시편들은 발레리의 영향에 의한 저적 방법의 도입과 동양적 허무사상을 바탕으로 한 우아한 형식미의 추구로 주목을 끌었다.
으로써 시단에 알려지게 되었다.
815광복이 되자 곧 상경하여 처녀시집 『석초시집』(1946)을 간행하였고, 1956년 한국문학가협회 사무국장에 선임되었다. 이때 『현대문학』지에 「서라벌 단장」「성지의 부」「적」「바라춤」등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다. 1959년 제2시집 『바라춤』이 간행되었다.
1969년 6월 아내가 사망한 뒤, 석초는 병을 얻었지만 같은 해 11월, 『예술원보』에 「한국의 꽃」을 비롯한 근작 10편을 한꺼번에 발표하여 건재를 과시했다.
1970년 제3시집 『폭풍의 노래』를 간행했다. 이 시기에 잡지 등에 발표한 작품은 제4시집 『수유동운』(1974), 제5시집『처용은 말한다』(1974) 등에 분산된다. 속초는 「꽃무리」라는 시를 끝으로 공식적인 작품 활동을 마감한다. 석초는 문학공보부에서 계획한 『한국문학대전집』에 수록할 장시 「천지」의 집필을 시도하다가 1975년 3월 8일 66세 일기로 천식과 장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2. 작품경향
석초는 전기(1933~1959), 중기(1960~1964), 후기(1965~1975)의 시적 변이와 지속성을 통해 존재론적 한계를 지닌 인간이 어떻게 그것을 초극해 내는가 하는 숭고한 의지를 끈질긴 시작활동을 통해 보여주었다는 데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 참고문헌
김경철(2008), 「신석초 시 연구 : 욕망의 이론을 중심으로」, 중부대학교대학원 석사논문
정경학(1996), 「申石艸 詩 硏究」, 동덕여자대학교대학원 석사논문
이상오(2001), 「신석초 문학 연구 : 카프 활동기의 평론과 「바라춤」(1941)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
이병헌(1993), 「申石艸의 詩意識 硏究」, 대진대학교 대진논집
김선식(1975), 「申石艸연구」, 세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군자어문학
이성교(1976), 「申石艸硏究」, 성신여자대학교 연구논문집
조용훈(2001), 「신석초 연구」, 역락출판
이상오(2006), 「한국현대시의 상상력과 자연」, 역락출판
신석초(1985), 「신석초 문학전집1」. 융성출판
김원호(2007), 「현대시 분석노트」, 디딤돌